우리에게 말을 거는 유령들
- <로마 깜빠냐의 괴테> 티슈바인. 슈테델미술관. 프랑크푸르트
- <맨발의 톨스토이> 일리야 레핀. 푸시킨미술관. 상뜨페테르부르크
리비히하우스를 나와 보슬비 맞으며 마인강 따라 슈테델미술관으로 간다. 렘브란트 길과 홀바인 길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다. 기대감으로 전시실 계단을 오르자마자 정면 멀찍이 보이는 하얀 옷의 남자에게 단박에 불려간다. 괴테다. 흰옷을 입고 기대듯 앉은 괴테를 보자마자 어떤 열기와 함께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톨스토이다. 푸시킨미술관에서의 놀라움이 되살아난다.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맨발의 톨스토이를 보는 순간
‘정신’이라 불리는 것이 인간에게 있음을 확신했다
그 정신과 공명하는 몸이 단호한 부드러움으로
조화롭게 배경과 만나는 경계에
이글거리듯 스며나는 고요한 힘을 보았다
편안해 보이는 흰옷과 검은 바지, 간소와 검소
그의 맨발은 소탈이 아니라 그대로 충분함이었다
벌거벗겼어도 입은 듯했으리
인물을 잘 표현하기 위해 많은
소재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선언
길고 좁은 화폭, 수직의 나무와 함께 선
화가 스스로 언급한바 ‘겸허한 제우스’에게 경의를 바쳤다
어색할 수 있는 손을 헐렁한 허리띠에 찔러
몸을 꼿꼿이 세우고도 쉬는 듯한 자세를 지지함으로써
굵직한 정신성을 불러내는 동시에
대문호의 손이 머무는 검은 띠 아래
볼록한 주머니에는 성경책만이 아니라
군것질 봉지도 있을 거라는 믿음까지
일리야 레핀의 톨스토이는
이른바 정신이나 영혼이란 게 볼 수 있는 것인 듯
마음만 먹으면 떼어낼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실생활에서 우러난 인정과 확신의 재현
매료된 인물에 대한 지극한 헌정의 힘일까
두려울 것 없이 자신을 살고 이룬 사람의
모든 그림자를 잡아낸 화가에 대한 경탄 속에
삶이나 인간의 완성이라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일지
한없는 상념과 공감을 끌어낼 때 초상화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살아있는 유령이자
어떤 계승을 약속하고 서명하는 자리가 된다
레핀을 통과한 톨스토이 덕분에 초상화에 난데없는 관심이 화르르 일어나자, 먼저 갔던 뜨레찌야코프 미술관에서 스치고 온 초상화들이 생각났다. 아깝고 분함에 더하여 불붙는 자책감.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무소르그스키... 탁월한 인간의 전형들을 지나쳐 버렸으니. 가보지 못한 숭고한 노동으로 반복되는 삶의 자리, 고통을 벼려야만 가능한 위대함에 대한 사유의 토대를 높여주는 그들을 두고 왔으니. 본질이라 가정될 수밖에 없는 얼굴을 직면함으로써 반영당하는 일이 몹시도 벅찼음을 알겠다. 응시에 삼켜진 시각, 눈구멍만 있고 눈은 없는 거다. 슬프고 아프지만 어쩌리, 초상화 볼 눈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을.
눈을 크게 뜨고 괴테를 마주한다
대단한 사람 하나를 돋보이게 하려고 애쓴 흔적이
오히려 어설프게 만들었다고 흠부터 잡아보지만
풍기는 위엄과 고상한 힘에 밀릴 수밖에 없다
어떤 기울어짐과 어색함을 느끼는 중에
두 발이 모두 왼발로 그려진 것을 발견한다
그 일그러진 균형에서 나는 긴장을 풀고 균형을 얻는다
먼 곳을 응시하는 『파우스트』 작가의 부드러운 낯빛
흔들림을 딛고 위대함을 더하는 눈은 투명하다
『이탈리아 기행』 1786.11월 18일 일기에 괴테는 이렇게 썼다. ‘성베드로 성당에서 라파엘로의 <변용>을 보았다. 이 모든 그림들은 마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다가 이제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친구 같았다.’ 너무나 쉽고도 다정하여 아쉬울 정도였으나 생각할수록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이 있을까 싶던 문장이었다. 그가 정치가로서 ‘인간은 싸우는 자’라고 말했고, 철학자로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고 했어도 그는 시인이며 그의 말은 시인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