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경이 Nov 24. 2022

뭐하러 참아

춤추듯 뻗어가는 팔들

오늘은 취리히로 가는 날이다. 아침에 Y와 P의 짐 싸는 솜씨에 놀랐다. 며칠 같은 공간을 쓰면서 그들이 준비해 온 반찬을 먹으면서도 놀랐을 뿐 아니라 검소하면서도 소비할 줄 아는 능력까지 세 번이나 놀란 셈이다. 설거지는 내가 한다면서 고무장갑을 꺼낼 때 두 사람이 얼마나 웃던지. 흐흐, 고무장갑을 가져왔거든. 나는 설거지를 잘 하니까, 고무장갑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으니 말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바젤 지나 3시간, 국경도 없이 달린다. 숙소가 맘에 든다. 단순한 구조에 튼튼하고 간편한 내부 설비. 약간 까다로운 작동법을 익힌 뒤 닫힌 창문은 철통이다. 바람 한 점, 벌레 따위 어림없다. 아귀는 매끄럽고 묵직하나 가볍게 들어맞는다. 우리 시골집도 이런 창이면 좋겠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Y가 나를 부른다.    

  

“이리 와 봐요. 방에 이 그림 봤나, 이거 어때?”  

“맘에 안든다는 말씀이죠?”

“응, 이거 뗄까?” 

“그렇게 싫으세요?” 

“응, 너무 심란하네.” 

추상화라고 우기는 붉은 계열 색조들이다. 

“떼요, 그럼.” 

“떼자.”      


침대 위에 버티고 선 Y가 액자를 잡을 기세여서 얼른 올라가서 거든다. 퍽 무겁다, 100호는 훨씬 넘을 듯. 조심스럽게 내린 다음 벽에 기대어 놓았다. 

“이런 건 처음 해 보네요. 멋져요. 그냥 못본 체 넘어가지 않는군요.”

“뗐다가 달아놓고 가면 되지, 뭐 하러 참아.” 

“보통 참잖아요. 대충 참고 견디며들 살잖아요.”

“그렇지. 잠깐이면 될낀데도.”

“그러게요~~ 이렇게 떼고 잔 사람이 또 있을까요? 하하하”

“그런가, 내가 별난가? 하하하 하하하...”

“별난 셈이죠? 크크크”

“아니, 박선생이 더 별나다. 그냥 두자 해도 될낀데 뭘 같이 떼자 하노.” 

“그런가요?”     


우리는 정말 실컷 웃었다. 진심 통쾌하다. 뗐다가 다는 수도 있는 거였어! 그냥 두자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거야!! 아주 잠시 그의 a를 확인한 듯, Y의 입술을 통해 a의 실체를 본 듯. 그의 a와 나의 a가 보일락말락 끊이락이으락 겹치나 싶더니 사라지고 없다. 벼룩에 물린 데를 긁고 난 직후처럼 시원하다. 빨긋빨긋 조금 따갑지만 강적 하나 물리친 것 같은 승리감조차 느낀다. 단번에 모든 통로가 뚫린 듯하다. 찰나일지라도. 

    

일행이 모두 나가서 함께 걷기로 했다. 시내 구경을 하다가 전차를 타고 취리히 호수 쪽으로 간다. 콰이다리 근처에서 내린다. 빛나며 부서지는 물 위의 태양!에 반한다. 천상에 오른 듯, 하늘 호수를 오가는 배의 상쾌한 소리와 붐비는 사람들의 기대감에 취한다. 바다 같은 호수에 담긴 하늘이 물빛에 부서지니 비현실감을 더한다. 새파란 바람이 황홀히 가득하고 하얀 삶이 눈부시다.      


오페라극장 앞 노천카페에서 이른 저녁을 먹는다. 다림질이 잘 된 새하얀 리넨 식탁보가 깔려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영어에 별 관심 없는 직원의 태도도 싫지 않다. 포도주는 맛있었고 아스파라거스 요리도 아주 훌륭했다. 감탄으로 시작한 끼니에 포도주를 몇 잔 더하자 무겁게 가라앉는 순간이 왔다. 며칠 쌓인 불협화음이 톡톡 투둑 터지면서 잠시 그림자까지 잃어버리는 듯 했다. 갑자기 누군가 과도한 의존성이나 유약함을 내보일 때면 당황스럽지만 남을 통해 자신의 a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다. 김밥 못지않게 스스로 옆구리 터져볼 뜻밖의 기회를 준다. 그것은 터질 수 있거나 터뜨릴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슬프고 아픈 자가 뚫고나가지 못하는 벽에 부딪힐 때, 사랑도 지지도 받지 못한 자의 상처가 작동되는 것을 볼 때는 고통의 전염만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기대도 함께 오는 법이다.  

    

각자의 시간이 꼬아낸 힘을 발견하며 나는 다시 놀란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주장하면서도 문을 닫아걸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삶의 길이가 만드는 힘을 보았다. 공감과 배려라는 말을 입술 끝에서만 굴리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인간의 말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을 부르고 의미를 찾으니 이해 못할 것은 없다. 심리적 진실을 따라 한 줄기 온전한 순함이 전달되어 한동안 이 봉합은 터지지 않을 거다. 각자 품고 녹일 것이다.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으니 결국 모든 사람에게서 나를 본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나는 모든 나과 만나고 싶다. 내가 살지 못한 삶과 사람을 천천히 관찰하고 싶다. 술 몇 잔으로 a와 친해진 듯.    

  

마음이 놓이면서 알맞게 취기가 오른 내 눈앞에는 포도밭이 펼쳐진다. 지난 며칠 프랑스 알자스지방을 다니며 보았던, 특히 리퀘위르Riquewihr를 굽이치던 포도밭. 얕은 구릉을 오르내리던 그 녹색들은 몇 달 뒤면 ‘붉은 포도밭’이 될 것이었다. 곧 샛노란 태양은 붉은 잎새와 덩굴들을 보라색으로 만들 것이었다. 붉은 덩굴 사이 주렁주렁 연두빛으로 반짝일 포도송이들, 미래의 포도주가 파도치는 포도밭이었다. 

와이너리 소재의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보게 만드는 포도밭.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포도밭이 품은 이야기들. 노동하는 사람들, 이런저런 만남과 포도주의 사연들. 가지치기와 거름주기, 광주리가 넘치는 포도 따기. 굵은 땀 흐르는 몸, 얼굴들. 커다란 통에 맨발로 들어가서 포도를 뭉갤 때 기묘한 이물감으로 자극되는 신바람. 와글와글 저장고에서 익어가는 소리...가 점점 깊은 침묵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일어날 놀라운 변화들. 맛과 향에 대한  그 조마조마함과 기대, 마침내 맛보기의 설렘. 대회에 출품하는 기쁨. 실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등 뻔하지만 질릴 수 없이 반복되는 꿈과 사랑이 제목도 주인공도 없이 지나간다. 흐뭇한 와인 향도 멈추지 않는다. 5월의 햇빛은 청정하고 나는 프랑스 포도밭 평원 사이로 줄을 따라 아직 열매랄 것도 없이 춤추듯 뻗어가는 팔들을, 힘찬 덩굴과 잎새를 보며 좁다란 포장도로를 서두름 없이 달리고 있었다. 

     

취한 김에 말하자면 신의 선물 중 으뜸은 와인이다. 만화 <신의 물방울>, 그 소란한 과장과 수다를 완전히 용서하며 한 잔 한 잔 샀던 까닭이다. 피노 누아 두 잔, 피노 블랑 두 잔이 그려낸 흐뭇한 중력의 밤. 알콜의 선함이 사람들을 위로하자 달빛이 발길을 끌어낸다. 두 잔을 더 마셨더라면 ‘딜라일라’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밤이다. 품는다. 익는다. 알알이 아름다운 포도여, 바쿠스여, 방울방울 눈물로 그리울 축제의 시간이여.

작가의 이전글 내 생에 알맞은 무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