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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Nov 25. 2022

무한성을 막 빠져나온

그의 화폭은 클 필요가 없다

- <파이프를 물고 귀를 싸맨 자화상빈센트 반 고흐. 취리히국립미술관 

 

깜짝! 

이게 여기 있었단 말이야?

이렇게 빨리 고흐를 만날 줄

최강의 자화상에 심장이 덜컥 

한 번도 천천히 본 적이 없는 그림이다

감상이 아니라 슬쩍 훑어보기

그의 눈과 맞장 뜨지 못했다 

계속 그럴 수는 없다 오늘은 보자 

  

두려움으로 빨려드는 특별한 매혹  

빨강과 주황이 수평으로 나뉜 배경에 

초록 웃옷, 파랑 모자는 강렬하다 

비교적 단순한 얼굴과 어깨가 

전면으로 가까이 당겨져 있어 

작은 화폭인데도 강렬함은 급격히 배가된다      


주황색 배경 윗부분을 노랗게 채우는 담배연기 

폭풍을 뚫어낸 눈에 담긴 고요 

자기 안의 괴물을 길들이면서

스스로 거듭나는 자의 전념과 평화

고유의 신성을 깨워낸 폭력적 행위를 

또렷한 인식으로 마주하는 담대함

그것을 직시하고 그려내는 또 하나의 행위가 

도대체 가능한가, 하나이자 둘 

화산 같은 충동, 창조하는 생명     

 

빈센트, 그는 어떤 말을 간절히 듣고 싶었던가 

아니면 듣고 싶지 않았던가 

눈길을 돌리느라 파이프를 물었을까 

천천히 분산되는 시선은 연기를 따라 색이 되고 

소리로 변하여 그의 귀를 돌며 상승한다 

무한성을 막 빠져나온 자의 

대양 같은 안도감이 퍼진다     


한바탕 지진이 퍼올린 고통이 꿈틀

붉게 퍼지는 여진의 열기 

파도처럼 밀려오는 장렬한 색채

그림은 화폭을 넘어서고 

액자 밖으로 밀어붙인다 

외부로 확장되는 그림

이미 외부까지 포함하니

그의 화폭은 클 필요가 없다 

거인          


거인에게 한 방 맞고 떠밀려 나와 취리히 역사박물관으로 간다. 러시아 혁명과 스위스 관련 전시를 보던 중에 ‘투스카니’란 말이 들리기에 깜짝 반가워 고개를 돌리니 H가 어떤 외국인 여성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 입보다 큰 눈, 맑은 이목구비가 빛난다. 다가갔다. 영어 발음은 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알맞게 과장되어 흐르는 자연스러운 몸짓에 웃음과 억양.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이런 건가. 홀린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 지금 여기서 아르바이트 중. 두 살, 8개월 된 딸을 키우는 27세 홀엄마. 몇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는데 지금은 일본어를 배우는 중이고 여동생은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단다. 아버지는 언어학 교수.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말에 언제든지 오라고 했다. 그가 오면 모든 것을 제공하고 싶을 정도로 둘러빠졌다. 내 환상구조에 들어맞는 사람이었던가! a는 누구의 이미지, 어떤 눈빛과 목소리에서 언제쯤 비롯된 것일까. 작별하고 몇 걸음 걷다가 사진을 한 장 찍자는 H를 따라 되돌아갔더니 그는 자리에 없었다. 천사가 잠시 내려왔던가. 이름조차 예쁘구나, 엘레노어. 말과 땅을 넘나드는 그의 자유를 잠시 맛본 나는 제정신이 아니다.  

    

밤에 취리히 호수로 나와 걸었다. 불빛은 시퍼런 강 위에 태양의 눈물처럼 반짝인다. 고호의 노랑들도 겹쳐 깔린다. 사람들은 노래하고 사람들은 춤을 춘다. 나도 노래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살랑살랑 춤추며 깔깔댄다. 사람들은 손을 잡고 걸으며 웃는다. 먹고 마시며 이야기하고 떠든다. 말소리는 하늘에 올라 점점이 자리를 차지하고 반짝인다. 구름이 휘돌더니 별들이 엄청 많이 떴다. 

<파이프를 물고 귀를 싸맨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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