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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Nov 27. 2022

밥태기나무, 제제처럼

내 그림자를 두고 떠났던 파리

 파리로헤르만 헤세의 수채화들     


일행과 헤어져 기차를 탄다 

남의 땅에서 홀로되는 순간은 외로움을 부른다 

스트라스부르 역 건물 수직의 철재를 따라 

하늘로 시선을 이끌어 올린다

서로 감정의 물결 속에 영향받은 자리를 문지른다 

떼어내어야 한다, 흔적을 남긴 채         

                    

넓디넓은 들판 사이 드문드문 선 높고 큰 나무들은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고독하게 버텨낸 사람 같다’

헤세 자신이 통과한 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할 터이다

정원 가꾸기를 즐긴 헤르만 헤세는 수채화도 남겼다     

하늘의 시작이 땅임을 일깨우는 그림들

믿음직한 황토빛이 근심없이 나무를 타고 오른다

헤세는 모든 것을 가진 정원사였다     


푹풍에 부러진 거대한 밥태기나무 이야기를 읽을 때 

자라지 않는 우리집 밥태기나무의 미래가 보였다

유다가 매달려 죽었다는 전설을 가진 유다의 나무

봄에 진분홍꽃 톡톡 튀밥처럼 터뜨리고  

꽃진 자리 붉은 갈색 품은 연두 잎새 설레지만  

마른 콩깍지 같은 열매는 볼품 없는 밥태기 

헤세는 그 나무 때문에 이사를 왔으며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고 썼다      


걷히는 안개 속에 그 말이 성큼 다가온 이후 

우리 마당의 밥태기나무는 

장대한 거인으로 보였다 

나를 감싸는 그것을 향해 고개를 들고 속닥이는 

주름지고 작아진 내 모습이 절로 상상되었다

라임오렌지 나무와 제제처럼      


파리, 한 달 머물 집에 왔다 

클리치대로를 사이에 두고 몽마르뜨르와 이웃한 곳

기다란 창문을 모두 활짝 양편으로 열어젖힌다

사크레쾨르 성당 머리가 훤히 빛나고  

기우는 햇살에 눈부셔 찡긋 눈물도 한 방울

이제 내 꼬리를 밟으며 걸어야 한다

오랜 질문과 투쟁, 혁명의 역사가 만든 도시

미술관마다 내 그림자를 두고 떠났던 파리

남기고 온 그 여름을      

         

                                                                              

● 그 나무는 정원의 은밀하고 깊은 땅속에서부터 뻗어 올라와 거의 내 방 베란다에 닿을 정도로 컸다. 화려한 나무는 그야말로 배의 돛대처럼 보였다! 나는 이 관상용 관목 아래 서있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최근 거센 폭풍우에 마치 오래된 등대처럼 갈라지고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다. (헤르만 헤세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두행숙역. 웅진지식하우스. 132ㅉ)      

◀ 해세의 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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