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렵에는 얇은 코트 하나로도 겨울을 버텼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려도 대수롭지 않았다. 몸이 아니라 시간이 젊었던 탓이다.
서른이 되자 추위는 더 이상 계절의 문제가 아니었다. 난방비를 계산하고, 출근 시간을 맞추고, 몸살이 오면 하루를 통째로 잃었다. 그렇게 나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구성원이 된다는 말은, 어느새 설명이 필요 없는 선택들 속에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친구들도 비슷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날도 평범한 저녁이었다. 메뉴를 고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고, 대화는 회사 이야기와 물가 이야기 사이를 오갔다. 그때 한 친구가, 마치 숟가락을 내려놓듯 말했다.
“나 직장 관두고 학교 다시 다닐라고.”
순간 공기가 멈췄다. 놀람보다는 계산이 먼저 돌아갔다. 우리는 그의 용기를 칭찬하지 않았다. 대신 현실을 불러왔다. 마치 준비된 대사처럼 말들이 튀어나왔다.
“너 이제 돈 벌어야지.”
“지금 어딜 가나 다 힘들어.”
“결혼은 생각 안 해?”
“등록금은 또 어떻게 하려고.”
“지금은 경력 쌓을 때잖아.”
우리는 걱정해주는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아주 성실한 사회인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바라봤다. 이미 그 질문들을 수십 번은 스스로에게 던져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맞다. 그런 고민을 한 번도 안 해보고 결심했을 리 없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갇혀 있었다.
나이, 연차, 연봉, 다음 단계.
보이지 않는 칸막이 안에서 생각했고, 그만큼 남도 그 안에 있어야 안심이 됐다. 누군가 칸을 벗어나려 하면, 붙잡기보다는 설명부터 했다. 그게 배려라고 믿으면서.
그날 이후 마음이 불편했다.
마침 읽고 있던 소설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었다. 할아버지가 잡화점을 운영하며, 밤마다 도착하는 고민 편지에 답장을 써주는 이야기다. 기적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정을 끝까지 들어주는 데서 시작된다는 내용이었다. 책 속의 한 문장이 유독 오래 머물렀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그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듣지 않았다. 대신 사회가 요구하는 목소리로 덮어버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말도 아니었다. 그 차이를 뒤늦게 알았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책을 덮었다.
문득 메시지 창을 열었다가 한참을 멈췄다. 괜히 가벼워 보일까 봐,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망설였다. 그래도 보내야 할 말이 있었다. 계산 없는 말, 충고 없는 말.
“야, 너 진짜 용자다.”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그게 괜히 좋았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의 선택을 내가 먼저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