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살고 쓰다
배신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마키아벨리 너마저도!” 하고 외친 후에 카이저 소제는 죽었다.
미안하다. 낚시다. 본문과 아무 관련 없는 미끼용 글로 시작해 보았다. 어처구니없는 것을 틀리면 조회수가 많이 나올까 하는 희망으로.
<상향되는 독자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아마 ‘무관심’을 가장 두려워 할 것이다. ‘어그로 끄는 짓’을 경멸하는 고매한 저자들조차도 무관심은 공포일 것이다.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외로운 작업인데, 이 일의 가장 덜 외로운 순간인 ‘공개’의 순간에 내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면 슬픔이 밀려올 게 틀림없다.
근래에 ChatGPT가 화제가 되면서 글쓰는 일에 대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AI가 사람만큼 혹은 사람보다 더 잘 쓰게 되면 ‘작가’라는 직업은 사라질까? 그 생각 끝에 내리는 결론은 언제나 ‘아니오’였다. 작가라는 직업은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노력에 비해 큰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일이고, 밝은 전망이 비추는 직업도 아니다. 몇몇 스타 작가를 준거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 이 바닥은 예나 지금이나 소비자보다 생산자가 많은 기형적인 곳이다. 그리고 그 생산자들 대부분이 열악한 대가와 어두운 전망을 기꺼이 감내하며 버티고 있다(물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려고 애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들이 그렇게 버티고 있는 이유는 별로 복잡하지 않다. 그들은 그냥, 대책 없이, 계속 쓰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이 직업이 사라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우리는 계속 쓸 것이고, 계속 동료들의 글을 읽을 것이고, 동료를 격려해주고 이끌면서 이 업계를 지탱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쓰기 열망을 지닌 작가지망생이 계속 나타날 거라고도 믿는다. 그런 작가지망생이라면 AI가 쓴 글을 읽으며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업계의 작가들에게는 AI보다 위협적인 존재가 따로 있다. 상승하고 있는 소비자들의 안목이다.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조차 새로운 것은 아니다. 어슐러 르 귄이 변화하는 매체와 넘치는 오락물들 사이에서 활자 예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말한 바 있다.
최근 《뉴욕 타임스》에 실린 글에서는(2012년 3월 4일, 줄리 보스먼과 맷 리치텔이 쓴 “책 읽기를 방해받는다…… 그 책을 읽던 태블릿에게”) 로스앤젤러스에 사는 어떤 여성의 말을 인용했다. “정신 팔릴 데가 워낙 많다 보니, 책을 고르는 기준이 상향됐어요……. 최근에는 내 손끝에 온갖 오락의 세계가 있다는 걸 잊게 해 주는 책들에 끌려요. 그 책이 그럴 만큼 좋지 않다면, 아무래도 제 시간을 더 나은 곳에 쓰는 게 낫겠죠.”
(중략)
책은, 그것 또한 손끝으로 활성화시킨다 해도 우리가 여흥으로 여기는 움직이고, 깜박거리고, 씰룩거리고, 튀어 오르고, 반짝이고, 소리치고, 쿵쿵대고, 고함치고, 비명 지르고, 피 튀고, 귀를 찢는 등등의 경험 없이 재미있게 해 주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이 여자분의 주장은 명백하다. 책이 튀어 오르고 쿵쿵대고 피 튀는 등등의 경험과 같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재미있지 않다면, 그 책을 왜 읽는단 말인가?
-알라딘 eBook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중에서
르 귄은 책의 종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책이 다른 형태로 변해야 할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르 귄의 예측은 타당하다. 지금의 활자 매체는 전자화되었고 전자화된 다른 매체들과 한 바구니에서 경쟁하고 있다. 핸드폰이라는 작은 바구니에서 말이다. 독자들이 바구니 속에 든 물건 중에서 굳이 책을(혹은 책의 적통 후계자인 매체를)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있더라도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오래 전부터 작가들은 고급 취향의 평론가, 장서가, 학자 그룹과 자본을 앞세운 ‘독서 시장’이라는 출판 및 콘텐츠 사업계 사이에서 ‘상향’의 기준과 준거를 새로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휴대폰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 세들어 살고 있는 다른 매체들과도 소비자의 시간을 두고 경쟁해야 한다.
<SNS와 쓰기 루틴>
책보다 자극적인 매체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은 내 글만이 아니다. 쓰는 사람인 나조차 주의집중력 흡수체인 이 막강한 상대와 싸워 이겨야 한다. 근래에 나는 MBTI 검사를 새로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천성에 맞지 않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사회활동이 전부 휴대폰 속에 든 세상이다. 나는 본래 전화를 잘 안 받고, 문자도 잘 확인하지 않는 것으로 주변인에게 낙인 찍힌 인간이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다쳤을 때조차 1시간이나 지난 뒤에 부재중전화를 보고 학교와 통화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요즘은 10분마다 휴대폰을 확인하는 기분이다.(물론 기분만 그럴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단톡방의 대화에서 타이밍을 놓친 후에 나타나곤 한다.)
이제 이 정신없는 일상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루틴을 정해야겠다. SNS를 확인하는 요일과 시간을 정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날에는 그 일에만 온전히 몰두해야겠다. 어느 하나도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휴대폰 앱들 사이를 건너뛰는 정신을 감당하기 힘들다. 힘에 부치는 게 아니라 점점 중독된다. 행위의 목적이 아니라 행위 자체에 빠져드는 것이다.
어제는 목적도 없이 인친들 새소식 목록을 반복해 갱신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모골이 송연했다.
<고통과 대가>
글을 쓰고 읽는 일은 정신노동이기에 앞서 육체노동이다. 지난 주말에 큰아들이 밥을 푸고 있는 나를 뒤에서 툭 건드리며 말했다.
“엄마, 거북목이야. 어깨 펴.”
그리고는 거북목에 대해 유투브에서 습득한 지식을 잔소리처럼 늘어놓았다.
나는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를 앓고 있는데, 아직 수술할 정도는 아니지만,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려면 부지런히 걷는 운동을 하고 자세를 바로잡아야 한다. 아들이 이만큼이나 커서 엄마에게 잔소리를 해주니 너무 고맙고 기특하고 뿌듯했다. 내가 나에게 잔소리를 해주는 존재를 만들어내다니, 스스로가 대견했다. 무려 11년이나 걸려 해낸 일이다.
농담조로 시작했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과 글을 쓰는 일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이 과정의 고통이 훗날의 보상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지 말자고, 그저 내게 주어진 이 과정을 즐겨야 한다고 말이다. 잔소리꾼 아들 녀석을 만들어낸 것에 뿌듯해하듯이, 하루하루 쓴 내 글들이 신통치 않아 보일 때도 ‘그래도 이만큼이나 썼다’는 뿌듯함을 느껴보자고.
고통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심리는 많은 비극을 낳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들은 나중에 큰 영광을 예비하기 위해 주어지는 시험이 아니다. 우리는 고통을 지불하고 성공과 존경을 살 수 없다. 다만 내가 겪은 고통을 통해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을 연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연민의 기회를, 연민의 소양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한다. 내가 겪은 고통이니 남에게도 주어져야 한다고, 그런 고통을 반드시 지나가야 성공한다고,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남에게도 윽박지른다. 그런 유형의 인간이 부모가 되면 최악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고통이니까.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기쁨이기 이전에 고통이다. 그 고통에 보상을 바라기 시작하면 부모 자식 사이에 지옥도가 펼쳐진다. 보상이 있을 수 없는 일에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힘들게 만든다.
글쓰기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을 가지려 한다. 고통스럽게 쓴다고 대작이 나오지 않는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런 건 강요하지 말자.
<그 외 독서 생활들>
오늘 오전에 배명훈의 『미래과거시제』를 완독했다. 앤솔로지나 잡지에서 이미 읽은 글이 많았는데,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다. 아니, 오히려 다시 읽으니 더 재미있었다. 배명훈의 글은 여러 번 읽을수록 재미가 우러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오르지 못할 나무지만 자꾸 쳐다봐야 내가 다듬고 있는 것이 분재이고 진짜 나무란 건 따로 있다는 걸 알지.
이 책의 수록작 「홈, 어웨이」의 서소희는 어쩐지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인물이었다. 언제나 털을 세우고 세상과 맞짱 뜨는 기분으로 살아야 겨우 ‘과작’을 달성하는 작가라니. 김은경은 동의하지 않는, 김은경을 라이벌로 생각하는 서소희가 어쩐지 애틋했다.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에 실린 정희진의 글 「식민지 남성성과 미소지니」는 매우 훌륭한 글이다. 해외 걸작들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겠지만, 한국문학에서 판례 인용하듯이 해석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온 정전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더 시급하다. 그 작업은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제와 화석화가 되어버린 문학 해석을 새로이 동시대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학자들이 더 나오기를 바란다. 정희진처럼 용감하게 새 잣대를 들이댄다면 정말 좋겠다.
오랜만에 『자기만의 방』을 다시 펼쳤다. 하미나 작가가 <시사인>에 기고했던 “여성이 글을 쓸 때는 이중의 억압이 발생한다”에 실렸던 인용부를 찾으려고 펼쳤던 것인데, 펼치고 보니 종종 펼쳐서 다시 새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미나의 글은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겪는 이중억압에 대한 것이었는데, 글 전체의 요지를 드러내는 한 부분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결국 여성이 글을 쓸 때는 이중적인 억압이 발생한다. 남성 중심적인 시선으로부터의 억압,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로서 무결하게 써야 한다는 억압,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통과한 글만이 좋은 글은 아닐 것이다.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글이 좋은 글일 수 있다. (중략) 반발하는 사람도 많은 글, 타인을 미워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새롭게 보게 하는 글, 읽는 이의 마음에서 자라나는, 그리하여 경계를 넘어가는 글.
- 하미나, “여성이 글을 쓸 때는 이중의 억압이 발생한다”, 《시사인》, 2020.8.25.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평하는 부분에서 인용한 것이다.
예술가의 마음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있어서는 안 되며, 소비할 수 없는 이물질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요. (중략)
상처받은 것에 대해 항의하고 설교하며 비난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 복수하고자 하는 욕심, 세상을 어떤 고통이나 슬픔을 목격하는 증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그의 안에서는 모두 불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 알라딘 eBook <자기만의 방 (펭귄 클래식 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중에서
하미나가 말한 이중의 억압을 넘어서는 것이 버지니아 울프가 정해둔 좋은 글의 기준이겠지만(하미나 작가는 그런 요지로 썼지만), 나는 이마저 하나의 억압처럼 느낀다. 저 초연한 작가의 자세라는 게 가능한 것인가? 결국 삼중의 억압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보다는 내가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뒀던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되새기는 편이 내 정신건강에 더 좋을 것 같다.
19세기 초 중산층 가정의 집에는 거실이 단 하나밖에 없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여성이 글을 쓴다면, 그 여성은 가족의 공동 거실에서 써야만 했을 것입니다. 나이팅게일 선생인 격앙된 목소리로 불만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여성은 자신만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 30분도 되지 않았으며” 그 시간마저 언제나 방해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런 곳에서라면 산문과 픽션을 쓰는 편이 시나 희곡을 쓰는 편보다 쉬울 것입니다. 집중력이 덜 필요하니까요. 제인 오스틴은 죽는 날까지 그런 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조카는 전기에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숙모가 어떻게 이 모든 성과를 이루어냈던 것인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숙모는 따로 마련된 독립된 서재가 없었고, 분명 갖가지 방해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공동 거실에서 작품을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숙모는 가족이 아닌 하인이나 손님, 다른 어느 누구도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심했다.” 제인 오스틴은 원고를 숨겨 두거나 압지로 덮어 두었지요.
- 알라딘 eBook <자기만의 방 (펭귄 클래식 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중에서
위 인용부는 집에서 글을 쓰려는 많은 여성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은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도 썼다. 자, 이제 최악의 상황에서 위대해진 여성들을 봤으니 우리도 쓰자.
다음은 보다 실질적인 조언이다. 문학 공부를 위해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다.
재미를 좇기 위해서라면 남성 작가들을 끊임없이 참조할 수 있겠지만, 도움을 구하고자 남성 작가를 찾아간다면 그건 아무 쓸모가 없는 일입니다. 램, 브라운, 새커리, 뉴먼, 스턴, 디킨스, 드퀸시, 그 누구든 간에 지금까지 여성을 도와준 적이 없었습니다.
- 알라딘 eBook <자기만의 방 (펭귄 클래식 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중에서
당신이 중년의 만학도 여성이라면 버지니아 울프의 조언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도움을 청할 때는 그 청을 진지하게 들어줄 상대를 영리하게 선택하는 편이 좋다. 여성으로서의 경험 외에 다른 강력한 무기가 있다면, 그 매력에 자신이 있으시다면 이 조언을 건너뛰어도 좋다.
<프로의 세계를 세속적이라 보는 아마추어들에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글쓰기도 묵묵히 골방에서 정진한다고 남들이 알아주는 건 아니다. 골방에서 자기 글을 써나가는 일은 기본이다. 겨우 베이스다.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필요충분조건 전부라고 여기는 아마추어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실 나도 오래전에는 아마추어였고 아마추어스러운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벽을 헤딩으로 깨부수고 프로의 길에 들어섰다. 아팠고 창피했고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지금도 여전히 얼얼하다. 계속 그럴지도 모르겠다.
문학도 사람 사는 일이다. 자본주의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사주고 팔아주고 더 잘 팔리게 홍보해주며 시장이 버텨나간다. 무턱대고 ‘내가 골방에서 이토록 정진했으니 알아주시오’ 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 일이다.
과학소설작가연대의 가입조건에는 ‘상업적 성취’라는 문구가 있다. 수상실적이든 계약출간이든 플랫폼 유료연재든 상업적 성취 즉 ‘원고를 팔아본 경험이 있는가?’를 묻는다(금액으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척도가 아닌 걸로 안다.). 처음 그 문구를 봤을 때, 매우 합리적인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 시장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확장하며 활동할 생각이 없다면, 굳이 작가가 되거나 작가 모임에 들려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상업적 성취란 그런 말일 것이다.
‘글을 적극적으로 팔아본 경험이 있는 자’
글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고 고매한 그 무엇이라 여긴다면, 절대치의 내적 성취를 이루면 명성이 저절로 따라올 거라 믿는다면, 그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영원히 아마추어다. 이것은 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2023.4.10~4.16. 다이어리에서.
버지니아 울프, 이소연 옮김,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1.(전자책)
배명훈, 『미래과거시제』, 북하우스, 2023.
어슐러 K. 르 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황금가지, 2021.(전자책)
정희진, 「식민지 남성성과 미소지니 - 이상, 〈날개〉」,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 문예출판사, 2023.
하미나, “여성이 글을 쓸 때는 이중의 억압이 발생한다”, 《시사인》, 202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