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가 행복한 나라를 위하여

읽고 쓰다 - 청소년 (관련) 소설 리뷰

by 서애라

작가란 사람들은 참으로 집요한 사람들이 아닐까? 내 안의 나를 돌아보며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타임머신이 주어진다면 세상을 혼돈에 빠뜨릴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타임머신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작가는 상황에 맞지 않아 하지 못하고 참았던 말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억력은 2차원 평면에 시공간을 우그려 넣어 발언의 기회를 재창조한다. 그때, 그 장소로 돌아간다면 이 말을 꼭 하고 말리라. 그렇게 곱씹다가 결국은 그 말을 ‘지면’이라는 타임머신에 실어둔다. 그렇게 하면 나의 말은 과거와 미래로 동시에 날아가는 셈이 된다.


말하자면, 바로 오늘 내가 할 말이 그런 것이다. 어느 모임에서 기이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작가들이 만들어 띄워둔 타임머신이 훅 날아든 기분이었다.


내가 참가한 자리는 청소년들을 몰아붙이는 ‘줄 세우기’ 학업 경쟁 문화를 비판하는 자리였는데, 어떤 분이 ‘줄 세우기’는 나쁜 것이라며, ‘개성’이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으니 아이들에게 개성을 가지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태도가 엿보였지만, 시간 관계상 누구에게도 반박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그분의 발언을 듣고 있던 나는 소름이 끼쳤다. 바로 그분과 같은 사람들의 탄생을 예견하고 전삼혜 소설가가 <토끼와 해파리>라는 청소년 소설을 이미 써 두었기 때문이었다.


전삼혜의 <토끼와 해파리>에는 ‘구멍’ 기간에 출생한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소설에서는 극단적인 저출산으로 신생아가 거의 태어나지 않던 5년 시기를 ‘구멍’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시에서 구멍 세대 아이들을 모두 모아봐야 3백 명밖에 안 된다. 이 세대의 아이들에게는 경쟁이 사라졌다. 경쟁할 인구조차 안 되기 때문이고, 경쟁이 저출산의 원흉이라는 것을 깨닫고 교육 정책에서 ‘줄 세우기’를 완전히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덕분에 구멍 세대 이후로 출산율은 다시 올라갔다. 교육 현장에서는 경쟁 대신에 다른 교육 모토가 등장한다.


‘모두가 다른 향기로 피어나는 꽃처럼.’(전삼혜, p.29)


언뜻 들으면 매우 이상적인 교육 모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마다 향기가 다른 꽃이다.”라는 교육 모토는 결국 “너와 쟤가 같은 꽃이면 안 돼. 의견이 같으면 안 돼!”라는 강요에 가깝다는 것을.

‘자기만의 의견’을 가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른들은 모른다. 모두들 저마다 독특한 의견을 가지라는 건 결국 남의 의견에 쉽사리 ‘찬성’을 외쳐서는 안 되며, 서로 싸워야 한다는 선언과 같다는 것도. (중략)

‘이런 세대로 태어나고 싶진 않았어.’(전삼혜, p.31~32)


쉽사리 남의 의견에 동조할 수 없는 이 세대는 외롭다. 경쟁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니다. ‘손을 번쩍 들고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면 “쟤는 개성이 없어.”’(전삼혜, p.41)라고 말하며 무시당한다. 개성 넘치는 아이가 되라는 압력을 받는 아이들은 여전히 허덕거리며 산다.


평범한 주인공인 ‘나’에 비해 ‘신지우’는 남다르고 특별한 ‘천재’이다. 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튄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도 아픔은 있다. 또래 친구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신지우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하고 대단하다는 칭찬은 많이 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칭찬이 아니야. 나는… 나랑 나이가 같은 애들하고 지내보고 싶었어.(전삼혜, p.43)


이런 신지우를 보며 주인공인 ‘나’가 하는 생각은 조금 슬프면서도 소름 끼친다.


어쩌지, 단단히 세워둔 내 마음의 벽이 얼음처럼 녹아버릴 것 같았다. 손등에 점이 있는 통통한 여자애가 천재도 무엇도 아닌, 그냥 열다섯 살로 보여서.

약해지고 싶지 않은데…. (전삼혜, p.43~44)


‘줄 세우기’만이 경쟁이 아니다. 옆의 친구를 끊임없이 신경 쓰며, ‘쟤보단 뭐가 나아도 나아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면 그게 바로 경쟁인 거다.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영원히 깨닫지 못할 모양이다.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 연민과 사랑 대신에 경쟁의식을 가지는 게 성장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SF의 ‘외삽’을 이용해 설정된 가공의 세계이지만, 이 세계에서 주인공 ‘나’가 하는 말은 우리 세계의 짧은 생각을 가진 몇몇 어른들, 자식의 진정한 행복보다는 ‘성장 가능성’에만 초점을 두는 어른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줄을 세우지는 않지만 각자의 역량을 매섭게 측정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의 성장은 언젠가 끝날 텐데, 자신의 끝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저, 피어나라고만 할 뿐.(전삼혜, p.46)


전삼혜의 <토끼와 해파리>에는 이 외에도 주옥같은 서술들이 넘쳐나는데, 스포일러가 될까봐 더 말하지 못하겠다. 제목이 왜 <토끼와 해파리>인지도 알게 되면 무릎을 치게 되지만, 이것도 미리 알리면 재미가 없을까봐 입을 다물겠다. (힌트는 드리겠다. p.45를 정독하시오. 그리고 ‘토끼’와 ‘꽃’과 ‘해파리’의 상징성을 연결해 보시오. 거기에 ‘구멍’까지 더해지면 이 작가의 문학성에 감탄하게 된다.)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일독을 권하는 소설이다. 걸작이다. 장르문학이라는 틀에 넣기는 너무 아까운 작품이다. 필자는 작품이 일정 성취 이상을 이루면 장르 경계를 넘어 버린다고 믿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청소년 문학, SF 문학이라는 경계를 넘어 ‘교양 소설’(성장 서사)라고 호명되며 여기저기서 많이 읽히길 염원한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앞서 언급했던 모임이 시작하자마자 이 소설을 소개하고 싶다.




<토끼와 해파리>는 참으로 좋은 소설이지만, 우리 사회 전반에 경종을 울릴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다. 이 소설은 위대한 선지자처럼 앞서가 있다. 그래서 그나마 깨어있는, 혹은 깨어있다 자부하는 어른들 사이에서나 널리 읽힐 소설이다. 슬프게도 우리 사회에 ‘구멍’ 세대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까닭에 많은 어른들이 아직도 ‘줄 세우기’에 집착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개성을 강요하는 어른들은 그나마 ‘줄 세우기’에서 벗어나기라도 했으니 다행이라고나 할까.


설재인의 <이십 프로>는 한국사회가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줄 세우기’ 문화의 섬뜩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빙의’라는 환상적 요소가 살짝 가미되어 있는데, 소설 전체가 품어내는 으스스한 공포는 빙의에서만 나오지는 않는다. 이 소설의 서스펜스 중 상당 부분은 지독하게 사실적인 특목고 풍경에서 나온다.


특목고에서 ‘수최’라고 불리는 나정은 정교사로 임용된 지 얼마 안 된 초짜이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입학사정관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나정은 엄청난 곤란을 겪게 된다. 소설 내용의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그 곤란을 간략히 언급하자면, 특목고는 시종일관 ‘솎아내’라는 명령을 나정에게 보낸다. 처음에 나정은 그 일을 썩 잘 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소설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나정을 그런 일에 배치한 첫째 이유는 연차 지긋한 닳고 닳은 선배들이 그 일을 꺼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정 또한 솎아지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려 먹다가 내치기 좋은 일꾼이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배경은 희미하고, 머리는 똑똑하고, 일을 잘하며, 게다가 열심히 하기까지 하는 노동자들은 관리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칭찬을 듣게 된다. “수최라서 그렇게 해주는 거지, 누굴 믿을 수 있겠어?”(설재인, p.73) 믿고 부리는 일꾼인 것이다. 나정과 입사한 동기 중에 누군가는 다른 대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임은 가볍고 금전적으로나 경력증빙용으로 대가는 상당한 일이 주어지고, 교장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모님은 잘 계시죠?”


위의 문단 대부분은 소설가로서 내가 상상한 것이고 설재인의 본문에는 없다.(페이지 표지 부분 제외) 그러나 나정이 처하게 되는 곤경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녀 역시나 소설 속의 두 아이(예진, 고인)와 마찬가지로 시스템의 슬픈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줄 세우기와 솎아내기를 통해 아이들은 고통받는다. 있는 집 자식인 고인(왜 고인인지는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과 없는 집 자식인 예진이 받는 고통은 별 차이가 없다. 경쟁에서 이기라는 압박에 신음하는 아이들은 또래를 증오한다.


등신들이, 삼 등급도 못 받으면서 돼지같이 게을러 가난하다는 이유로 특혜를 받아 들어와서는 졸업장을 받고 나가는데 그걸 어떻게 참아?(설재인, p.97)


죽어서까지 이 사회와 그들의 부모가 심어준 경쟁 이데올로기에 묶여있는 ‘고인’을 보고 있자니 공포와 더불어 스산함이 밀려들었다. 한 줄로 세워진 세상이 자신의 기준에서 공정해야 한다고 믿는 저 이데올로기 속에는 능력주의 탈을 뒤집어쓴 기득권의 특권 의식이 숨어 있다.


능력주의가 우리를 어떻게 희롱해 왔는지는 낸시 프레이저가 소름 끼치도록 잘 설명한 바 있다.


실제 권력은 거대 기업과 대규모 투자자, 은행, 금융기관에게 있으며, 이윤을 향한 이들의 채울 길 없는 갈증으로 인해 지구 위 수십억 민중은 곡예를 벌이며 생명을 단축시켜야 하는 처지가 된다. 게다가 이 연예인들에게는 자기 지지자들의 문제를 풀어줄 해법이 없다. 이 문제를 만들어낸 바로 그 세력과 잠자리를 함께하기 때문이다. (중략) 간판스타는 훨씬 더 기발한 거짓말과 사악한 희생양 때리기로 판돈을 올리도록 내몰린다. 누군가 무대 장막을 끌어올려 사기 행각을 폭로할 때까지, 이 역학은 계속 고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주류 진보 저항 세력이 실패한 대목이다. '저항세력'의 지배적 흐름은 장막 뒤 권력을 벗기기는커녕 오렛동안 이 권력과 얽혀 있었다. (중략)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유주의-능력주의'적 흐름이 그 사례였다. 이들은 자유주의 헤게모니 아래 활동하며 오랫동안 진보적-신자유주의적 불록의 하위 파트너 노릇을 해 왔는데, (중략) 권력은 떼돈을 벌어들여 장막 뒤에서 웃음을 그치지 않는데도 우리는 반동파와 진보파가 각기 양쪽에서 간판스타 노릇을 하며 경쟁하는 싸움에, 사람들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짜고 치는 그 싸움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 pp.252-253)


인용이 좀 길어서 요약하자면 이렇다. '자유주의-능력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은 자본이 사람을 소모품처럼 굴리기 위해 만들어낸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환상적 이데올로기는 마치 가치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놈들은 자본과 몰래 잠자리를 하는 사이이다.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하고 소비하라고 악마의 속삭임을 계속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포만을 모르는 걸신 들린 자본의 속성처럼 교육 현장을 잠식해 들어간다. 모든 것이 '능력'으로 환산되고(태생적으로 주어졌던 것조차 '능력'으로 환산되고), 능력은 위계가 된다. 능력주의는 아이들을 무한 경쟁 체제로 내몬다. 어른들은 그 고통을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당연한 과정이라 치부한다. 그들이 이미 그러한 무한경쟁 체제 속에서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유롭다는 환상,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것과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완벽히 이분할 수 있다는 환상은 그 무한경쟁 체제를 움직이는 두 바퀴이다. 무한히 전진하는 전차에 끌려가는 아이들조차 그 환상을 믿는다. 엉뚱하게도 이 체제의 희생양 처지에 있는 또다른 약자를 미워한다.


자본을 움켜쥔 자들이 자본을 사회에 고루 배분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 때문에 생기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향한 혐오가 있다. ‘돼지같이 게을러 가난한’ 이들이라고 모든 것을 능력주의로 치환한 사고의 단순화, 폭력적일 정도록 단순화된 그 사고에서 빚어나온 혐오와 그 혐오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난 원한.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저런 원한은 스스로를 갉아먹을 텐데, 어째서 어떤 어른들은 자기 자식이 그런 혐오와 원한을 품으며 살기를 바라는 것일까?


논술지도를 할 때 한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특목고 입시를 준비한다고 해서 자기소개서 지도를 도왔다. 순수한 마음에서 그 학생에게 특목고 입시를 다시 생각해보라 조언한 적이 있다. 특목고의 ‘솎아내기’와 ‘깔아주기’에 대해 사전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은 일반고에 가서 충분히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었는데, 특목고에 간다면 다른 학생들의 내신 깔아주기 용도로 쓰이고 버려질 가능성이 높았다.


괜한 말을 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학생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무시 당했다’고 주장했다. 황당한 것은 내 앞에서는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집에 가서는 그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학부형과 긴 통화를 끝내고 내가 한 생각은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게 손해가 나는 믿음을 절대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옳은 것, 공정한 것을 하자고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의 합리적 선택을 하라 권했을 뿐이었다. ‘선별’되고 싶은 탐욕은 그들 자신을 망가뜨릴 텐데, 발아래 있는 행복 대신에 벌겋게 달아올라 유혹하는 ‘가진 자들이 정한 쳇바퀴’에 올라타려고 버둥대는 것이었다.


결국 그 학생은 특목고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듬해쯤에 내 예상대로 중도 포기했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접했다. 설재인이 보여준 세상은 내가 겪었던 세상과 너무나 겹쳐서 너무나 섬뜩했다.


나는 솎는 자인가, 혹은 결국엔 솎아질 자인가.(설재인, p.98)


이대로라면, 이런 경쟁 윤리관대로 산다면, 우리 사회의 90%는 ‘결국엔 솎아질 자’이다. 10%가 만든 룰에 따라 저 달아오른 쳇바퀴 속에 뛰어들어 장렬히 스스로를 불태울 생각을 하지 말고, 90%끼리 행복하고 화목하게 사는 세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왜 그게 그토록 안 되는가? 왜 이대로 대한민국은 헬조선이 되고, 인구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가?




최근에 읽은 단요의 <다이브>에서는 부모가 자식에 쏟아붓는 ‘일방적 사랑’을 되돌아보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로봇이 되어버린 채수호는 자기 의지로 로봇이 된 게 아니다. 희귀병에 걸려 죽게 된 딸을 살려두려는 부모의 의지로 그렇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로봇 채수호의 기억에서 그들이 원하는 추억만 남기고 원하지 않는 기억을 삭제한다.


“날 멋대로 만든 건 엄마 아빠니까 정답은 둘이서 찾아. 나한테 책임 떠넘기지 말고 둘이 알아서 하라고. 날 그렇게 못 견디겠으면 배터리를 빼. 그러면 되잖아.” (단요, p.162)

“만들어진 대로 딸 역할이나 잘하면 될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왜?” (단요, p.160)

얼핏 보면 막장스러운 부모 자식 간의 대화처럼 보이는 이 갈등은 사실 부모와 부모가 자식을 대체해 만든 로봇이 나누는 대화이다. 그런데 ‘만들다’는 동사가 가지는 중의성이 절묘하게 현실의 모든 부모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모두 자식을 만들었다. 그것도 멋대로. 그렇지만 배터리를 뺄 수는 없다. 배터리가 없는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만들어진 대로 딸 역할’을 하라고 ‘기대하는 대로 아들 역할’을 하라고 저 어머니처럼 압력을 가한다. 자식 잘 되라는 부모 마음을 운운하기에 우리 사회는 자식의 너무 많은 부분을 간섭하고 대리하고 대신 책임져 주는 부모로 넘쳐난다. 교육 문제에 있어 우리 사회는 너무 지나친 경향이 있다.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하겠다는 부모들의 도덕적 해이는 정치색을 뛰어넘어 만연해 있다.


- 예전 사람들이 컴퓨터에만 추억을 맡긴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었지. 이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컴퓨터에 있는 것들은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삭제했다가 복구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진짜 같으니까 그랬던 거야. (단요, p.144)

- 나도 추억이 뭔지는 알아. 그건 우찬이 모으는 유안 언니 물건 같은 거야. 이제 끝나서 어쩔 수 없는 거, 그냥 옆에 두면서 들춰 보기만 할 수 있는 거, 그런데 너는 아니잖아. 너는 스스로 생각하고 계속 변할 거잖아. (중략)

- 그러니까, 네 부모님이 널 계속 보고 싶어서 만들었다고 해도 널 그렇게 대하면 안 됐던 거야.(단요, p.145)


스스로 생각하고 변하는 존재라면 로봇이든 사람이든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마음대로 수정하고 삭제하고 복구하고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솎아내는 ‘대상’이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주체이다. 주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꽃이 되어도 어떤 꽃이 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십 대들은 로봇보다 나은 취급을 받고 있는가?


옆의 꽃을 보라고, 더 크고 튼튼해지든지 옆의 꽃을 짓밟든지 다른 색깔의 꽃이 되라고, 그들에게 어째서 자꾸 강요하려고 드는가.




낸시 프레이저, 장석준 옮김,『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2022. (원제: CANNIBAL CAPITALISM)

단요, 『다이브』, 창비, 2022.

설재인, 「이십 프로」, 『림: 쿠쉬룩』, 열림원, 2023.

전삼혜, 「토끼와 해파리」, 『토끼와 해파리』, 아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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