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항상 내게 대학 교육이 작가를 억압하느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그 억압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훌륭한 문예창작 교수라면 막아낼 수 있었을 베스트셀러들이 여전히 많이도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까.
-플래너리 오코너
어느 책의 서두에 이런 글이 있었다. 아마도 작법서였다고 기억한다. (지금 내 손에 메모만 있고 출처가 없어서 혹시나 출처 아는 분이 이 글을 읽으면 제보 바란다.)
위의 말을 정말 플래너리 오코너가 했는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랬을 것 같은 사람이긴 하다. 예비 작가들에게 잔인하게 굴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춘 사람이니까. 자기에게 엄한 사람이면 남에게도 엄할 '권리' 정도는 획득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남에게 관대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저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문예창작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다 보니 전공자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학위를 못 얻고 수료 상태이지만 말이다.
이젠 저 문장을 읽을 때마다 화가 치민다. 한편으로는 좌절감이 든다. 너무 맞는 말인데, 너무 잔혹한 말이기도 하다.
읽어야 쓴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읽지도 않고 쓰려는 사람을 경멸한 적도 있었다. 대단한 다독가는 아니라도 '읽는 인간'으로 부족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읽기와 쓰기는 절대량으로 정비례 관계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반비례 관계에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묻고 싶은가? 나도 그랬으니 누군가는 그렇게 묻겠지.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사람의 하루는 24시간이다. 그중에 잠자고 먹고 싸고 직장인이라면 직업 활동 시간을 뭉텅 빼내고, 가계부도 써야 하고 가스검침원도 상대해야 하고 택배 오배송도 처리해야 하고 등등, 여타의 생존 활동 시간을 빼고 남은 시간을 '읽기'나 '쓰기'에 배분해야 한다. 읽으며 동시에 쓸 수는 없으니 이것은 제로섬 게임이다. 읽기만 하면 쓰는 스킬이 저절로 생성되는 SF 세계관과 현실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AI 생성기조차 때려 넣기만 했다고 생성된 게 아니라잖은가? 생성물에 대해 사람이 '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럽다' 하는 판단을 내려 훈련을 시켰다지 않나. 사람도 자신의 쓰기에 대해 일정한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 엉망인 생성물을 배출하며 혹평을 듣다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짧은 훈련기간과 적은 양의 투입물로도 창작을 해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게 함정이었다. 쓰기의 세계에 본격 뛰어들기 전에는 그런 사람들의 선례만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본격 쓰기의 세계에 뛰어들자 처음 든 생각은 '나는 아닌가 보다.' 하는 절망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종종, 아니 매우 자주 '나는 아닌가 보다' 하는 절망감이 든다.
세상을 단순하게 보는 사람이 더 행복할지 모른다. 읽는 인간으로 살면서 언젠가 쓰기만 하면 전대물의 변신 장면처럼 휘리릭 짠 하고 쓰는 인간이 될 것이라 착각하며 사는 게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어떤 일을 '잘' 해낸다는 것은 행복해지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다.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끓게 되면서부터 지옥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게 바로 지금의 나이고, 플래너리 오코너가 손톱으로 꼬집어 뜯으며 알려준 진실이다.
나는 다독가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엄청난 다독가들이 있다. 하루 1권씩 읽어 치우는 사람도 있다(고 인터넷 공간에서 발견했다). 어느 해인가 내가 읽는 책들을 착실히 기록해 보았다. 한 해에 약 50권 정도였다. 그 시절에 나는 다른 야망이 전혀 없는 순수한 독자였다. 책은 구입한 것이 거의 없었고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책을 사도 온라인 택배 구매보다 오프라인 서점을 이용한 구매를 주로 하던 시절이었다.
도서관과 오프라인 서점을 이용하는 독서가의 독서 형태는 온라인 구매자의 독서 형태와 조금 다르다. 전자는 책이 많은 공간에 가서 목차도 들추어보고 진열대를 살피기도 하며 책을 고르다가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양의 책을 빌리거나 구입해서 나온다. 한두 권, 많아야 서너 권이다. 들고 가기 힘들기 때문에 그 이상은 무리다. 집에 가져온 책은 여유롭게 천천히 읽는다. 완독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다 읽고 잘못 샀다고 욕할 확률도 그만큼 늘게 되지만.
후자는 일단 장바구니에 책을 때려 넣는다. 바로 구입으로 한 권만 살 때도 있지만, 대개는 카드 정산일을 염두에 두고 다음 정산일에 맞추기 위해 장바구니에 넣어둔다. 장바구니로 쓸어 넣는 책들이 실제로 결제되는 책들보다 항상 많기 때문에 장바구니 목록은 자꾸 길어진다. 다음 달 결제일에는 지난달에 결제 못한 책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장바구니에 남아서 구매욕을 상기시킨다. 어차피 박스 떼기로 책을 사도 택배 아저씨가 힘들지 내가 힘들지 않기 때문에 일단 돈이 생기면 못 다 산 한을 풀려고 든다. 표지와 목차만 본 책들이 집 책장에 넘쳐나게 된다. 어느 날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을 서가에서 뽑아 펼치다가 화들짝 놀란다. 짜자작 하고 책이 첫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탯줄도 안 자르고 책장에 처박아 늙혔던 것이다. 죄책감이 든다. 알라딘 중고책에 팔든 동네 중고장터에 팔든 조금 처분해 본다. 그리고 처분한 것보다 더 많이 산다.
그렇다. 저 일반화시켜 짐짓 아닌 척한 후자는 바로 필자다. 요즘은 대체 몇 권이나 제대로 읽고 사는지 감이 안 잡힌다. 앤솔로지나 단편집에서는 두세 편을 읽고 책장에 처박아 두기도 하고, 장편은 첫대목만 읽고 처박아두기도 한다. 논픽션이나 전문서적은 목차를 훑다가 특정 소제목만 읽어두기도 하고, 그마저도 읽지 않고 인테리어용으로 쓰면서 책 서평단의 글을 읽고 '읽은 셈' 쳐버리기도 한다.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완독한 책들도 있지만, 완독했다고 뿌듯해하는 일은 별로 없다. 어딘가에 써먹기에 완독의 경험이 별로 신통하질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도 유튜브 방송에서 '책으로 쳐들어가 원하는 것만 빨리 얻어 나온다'라고 말했다. 대학원의 학업이 내게 가르친 것도 그와 비슷했다(가르쳤지만 내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더 맞겠지.) 취미가 아닌 일이 되면 해당 분야의 종사자들과 경쟁해 시간 대비 생산물이 더 효과적으로 더 빨리 생산되게 해야만 한다. 논문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안 빼고 완독했다고 자랑하는 건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이다. 완독하지 않고도 완독한 효과를 내야 프로다. 완독해야 할 글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외골수처럼 굴 부분과 융통성 있게 처리할 부분은 알아서 요령껏 잡아야 한다. 그러니까 투입물은 생산물에 효율적으로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요령을 터득 못한 어리바리한 햇병아리이다. 책장에 쌓이는 책만큼 생산물도 쌓여야 할 텐데, 그렇질 못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한 해 50권의 책을 알뜰히 뼈 발라 섭취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때의 독서 경험이, 그 충만했던 감상들이 그립다. 이 무슨 아마추어리즘인가.
좀 더 실질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책은 뭘로 사는가? 당연히 돈으로 산다. 그럼 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당연히 근로소득에서 나온다. 아니라고? 당신, 금수저구만. 불로소득에서 나오는 분들은 이 아래로 읽을 필요가 없음을 미리 공지한다.
나는 비지식인 계급, 하층 노동자의 자식이다. 남편도 그렇다. 둘이 합체하니 기이한 생활 윤리가 생겨났다. 한 사람은 책 사는 돈이 너무 아깝고, 다른 한 사람은 책 사는 돈이 너무 미안했다. 물론 이번에도 후자가 필자이다. 결혼과 동시에 커리어를 포기해 버린 순진하고 멍청했던 이 여자는 신혼 시절의 어느 해인가 남편에게 가계부 검사를 받다가 화가 치밀었다. 책과 영화를 합해 그 달에 5만 원을 지출했는데,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5만 원도 못 쓰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남편이 아주 나쁜 놈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사실 책을 사보는 것 외에는 다른 취미에는 사뭇 관대했다. 비지식인 계급의 윤리관은 매우 기이해서 책은 안 되지만 다른 취미는 되었다. 예를 들면 홈패션, 규방 공예, 전통 매듭, 패션양재 같은 것들. 물질로 된 생산품이 나오는 것은 뭐든 용서되었다. 읽는 일은 노동 윤리관에 어긋났다. 실시간으로 튀어나오는 가시적 생산물이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참으로 온순했던 여자였다. 서로 사맞지 아니 한 결혼을 그만두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한 돈은 벌어서 쓰겠다며 온갖 알바를 전전했다. 주민등록상으로 동일인이라 여겨지는,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인물인 현재의 여자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짐을 싸서 집을 떠나겠다고, 집순이 밥순이를 그만두고 취업을 하러 갈 것이라 말한다. 아무튼 그때는 온순했기에 24시간 근무, 24시간 휴일이 주어지는 남편을 위해 단기 알바를 전전하며 자기 취미에 소요되는 돈은 스스로 벌어 썼다.
버지니아 울프까지 들먹일 것 없이 요즘 여자들이라면 경제적 자립이 자존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다. 나도 아이를 둘 낳고 죽었다 살아나는 경험을 두 번 하고 나니 온순과는 담을 쌓게 되어서 돈을 벌어 보겠다고 종종거리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 패턴대로 계속 살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세속적으로 괜찮은 인생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덜컥 뭐에 씐 것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 이후로, 그렇다. 다 망했다. 경제적 자립이고 뭐고 자존이고 뭐고.
공모전 상금을 다 합쳐 봐야 학비로 쓴 돈, 학교까지 장거리 통학하며 쓴 돈, 기회비용으로 날린 돈에 비교하면 웃음밖에 안 나오는 돈이다. 그래도 공모전 세계에서 나름 후한 상금을 받은 게 그렇다. 글자수 대비로 치면 아주 굉장한 성과다. 그래도 연봉으로 치기에는 상당히 겸연쩍어지는 금액이었고, 설상가상 첫 상금이다 보니 여기저기 보답하고 한 턱 쏘고 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이상, 외길 인생이었다. 쓰는 인간으로의 정체성 전환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거듭나게 했다. 글로 버는 돈은 언제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는데, 읽기는 읽어야 하고,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신간 서적을 돈 주고 사서 발췌독해야 하니 읽는 일에 돈을 더 써야 하고, 밤중에 탈출할 공간을 찾아 스터디카페도 끊어야 하고, 아이 픽업하러 가서 근처에서 버티며 읽거나 써야 하니 카페에 쓸 돈도 있어야 했다.
어째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은 무급이란 말인가? 읽은 것 많은 인간은 낸시 프레이저와 이반 일리치 선생을 동원해 가며 반란을 일으켰다(정확히는 저녁마다 술과 말로 사상교육을 했다.). 그래서 쟁취한 것이 남편의 성과급의 절반은 내 것이다. 월급에서 반을 내놓으라는 요구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건 실현 가능성도 없는 소리고, 우리 가계에 실익도 없는 짓이다. 어차피 그 돈은 다시 가정의 공동생활에 재투자될 것이다. 그러나 성과급은 다르지. 거기에는 확연히 내 도서구입비가 존재해야 했다. 아무렴.
'우공이산 프로젝트'라는 것을 실천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작가가 될 거란 희망이 없어서 학교에 갖다 준 등록금이 너무 아까웠다. 학교 도서관의 장서를 훔쳐서 등록금을 메워야겠다는 기똥찬 발상을 했다. 물론 진짜 훔치는 게 아니고 데이터를 훔치는 것이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스캔해 버리는 것이다. 언젠가는 학교 도서관을 집의 외장 하드 디스크로 모두 옮기겠다는 과대망상스런 염원을 담아 '우공이산 프로젝트'라 명명했다. 그 프로젝트를 위해 20만 원짜리 비파괴 스캐너도 장만했다.
그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었냐고? 여전히 실천 중이다. 아직도 논문 졸업을 못 해서 연구자 등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산'은 요원하고 '우공'은 달성되었다.
우공 씨는 스캐너값 20만 원으로 하인라인 전집이나 필 딕 전집, 혹은 르 귄 전집을 샀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우공 씨답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바로 반성한다. 그럴 시간에 글을 써서 출판사에서 추천사를 부탁한다며 공짜로 책을 주는 작가가 되어야 하질 않겠냐고, 내 안의 우공 씨를 나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