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집은 공간이자 생명체다. 집에 간다는 것은 곧 늙은 시츄에게 간다는 뜻이고, 집을 나선다는 것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녀석을 현관에 떼놓는 일이다.
15년의 동거생활 중 녀석이 없는 집을 경험했던 시간은 약 일주일 정도인데, 녀석의 뒷다리 인대가 끊어져 동물병원에서 수술하고 입원했던 기간이다. 그 기간 동안 동물병원에서는 개가 잘 있다는 증거로 매일 사진을 보내주었다. 집에서 집 밖에 있는 녀석을 보며 그리워한 유일한 경험이다.
개를 키우는 일이 '책임'의 다른 말이란 것을 녀석을 집에 들이고 나서야 알았다. 개와 함께 4년을 보내고, 아기가 생기고, 개와 한 아이가 함께 2년을 보내고, 작은 아기가 하나 더 생기고, 개 한 마리와 두 아이를 돌보는 동안 10년이 흘렀다. 아이들은 자랐고 개는 늙어갔다. 개를 야단치는 일은 줄고 아이를 야단치는 일은 늘어갔다. 바쁘게 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개가 아주 많이 늙어 있었다. 한쪽 눈은 실명했고, 다른 쪽 눈도 거의 안 보인다. 소리를 질러야 알아차린다. 산책을 나가면 금세 지치고 일정한 거리 이상 집에서 멀어지려 하지 않는다. 불현듯 사지마비가 오며 뻣뻣하게 넘어져 비명을 지르는 일도 서너 번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개는 주인인 나에게 집착하는데, 분리불안 수준인 그 마음에 늙은 몸이 따라주질 않는 모양이다. 내가 서재방에서 글을 쓰면 녀석은 책상 아래 엎드려 자는데, 내가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도 모르고 그냥 잔다. 그러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화들짝 놀라 온 집안을 헤매며 나를 찾아다닌다. 눈과 귀가 안 들리니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아야 알 수 있다. 종종거리며 다니다가 내가 있는 곳의 1미터 앞에 오면 꼬리가 한들거린다. 주인의 냄새가 나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한 번은 서재방에서 글을 쓰다가 침실로 가니 아이들 둘이 퀸사이즈 침대를 다 차지하고 자고 있었다. 두 아이 모두 제법 자라서 자기 방의 자기 침대가 버젓이 있는데, 엄마에게 무슨 장난을 치려 했는 모양이다. 엄마를 기다리다가 잠들어 버린 듯했다. 나는 허리 디스크가 있는 데다가 아이들 덩치가 커져서 옮기기 힘들었다. 안방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니 개도 자기 방석에서 잠들어 있었다. 셋을 한 방에 두고 찬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문을 닫아주고 나왔다. 그렇게 나만 아이들 방으로 가서 잤다.
잠결에 굉장한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방문을 긁어대는 소리와 귀곡성에 가까운 울음이 들렸다. 옆집에서 호러 영화를 쩡쩡 튼 줄 알았다. 그게 아니고 안방에 갇힌 녀석이 나를 찾는 소리였다. 녀석이 뒤늦게 내가 침대에 없다는 걸 알게 된 모양이었다. 달려가 문을 열어주니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앞발을 들어 안겼다. 다행히 아이들은 숙면에 들어 깨지 않았다.
나는 그 뒤로 다른 방에서 잠을 청할 생각이거나 새벽까지 글을 쓸 생각이면 개부터 챙기고 있다. 온 집안을 소란하게 만들어 온 식구를 깨우게 될까 봐.
개가 자기 죽음이 가까워 올수록 나와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영영 헤어지게 되겠지만, 그렇게 될 테지만, 그래서 지금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모양이다. 나도 그렇다. 녀석 때문에 긴 여행도 선뜻 못 가는 삶을 살지만, 녀석이 영영 떠나는 날이 곧 온다고 생각하면 여행이 인생에서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 멀리 가면 갈수록 탄소 배출량이나 늘겠지. 자기 사는 곳의 풍경을 업로드해 보여주는 친절한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인데. 모바일과 컴퓨터 속으로 여행을 가지 뭐.
녀석과 함께 한 시간들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다. 생명을 하나 키운다는 게, 그 책임의 크기와 구체적 모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애견 인구가 많지 않았고, 주부 잡지에 버젓이 개 키우지 말고 애를 낳으라는 암시를 담은 공익광고가 실리던 시절이었다. 그 경악할 광고를 보고 여기저기 민원을 넣었던 기억이 난다.
녀석이 떠나고 나서 다시 개를 키우겠냐고 물으면 항상 '아니'라고 답한다. 떠나보낼 슬픔 때문이 아니라, 키우던 동안에 직면했던 온갖 어려움들을 다시 겪어낼 자신이 없다. 그런데도 애견샵 앞을 지나가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유리벽에 붙어서 강아지들을 쳐다본다. 고물고물 한 생명들을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애들은 '남의 집 자식' 같은 애들이니까. 남의 집 아이들은 모두 귀엽지. 내 자식을 키우며 생기는 복잡한 감정들과는 다르지. 살균된 감정이지. 그런 귀여움은.
누가 집에 놀러 와서 개가 왜 저렇게 자꾸 자냐고 물으면 나는 "죽는 연습 중이니 내버려 두라."라고 농담을 하곤 한다. 개와 함께 한 15년은 내 안에 블랙 유머 같은 감정을 만들었다. 웃고 난 뒤끝이 슬프다.
어느 날, 개가 자다가 일어나지 않으면, 영영 자기로 결심한 걸 알아차린다면, 나는 우리의 연습이 끝났다는 걸 알게 되리라.
아주 긴 연습이었다고, 함께 사는 일에 대한 길고 긴 연습이었다고, 실전인 줄 모르고 연습만 하다가 끝나버렸다고, 추도문을 쓰게 되리라.
202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