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총체적 시각, 텍스트 내외부의 변증법적 상호작용, 그리고 독서를 둘러싼 인간행동양상들, 결국은 창작자 입장에서의 베스트셀러론 무효용설
- 읽고 쓰다
얼마 전에 알라디너 TV의 배명훈·김겨울의 북토크를 듣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배명훈 소설집 《미래과거시제》가 출판되자 출판사에 독자들로부터 항의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오자가 너무 많다고 말이다.
《미래과거시제》에 수록된 단편소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는 지속된 팬데믹으로 경음이 사라진 세계를 ‘외삽’으로 상상하고 있는데, 재미있게도(그리고 배명훈답게도) 소설 본문이 경음을 제거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탈출’은 ‘달줄’로, ‘통촉’은 ‘동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형태적 특징은 내용의 진행과 맞물리며 기표와 기의가 서로에게 ‘비관습적인’ 영향을 주게 되고, 그 상호 변증법적인 영향이 뒤엉키며 독서 행위에서 ‘이해’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어렵나? 쉽게 말해, 아무 쪽이나 펼치고 읽기 시작한다면 당신 눈에는 ‘오자’ 밖에 안 보인다는 말이다.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이해하고 읽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끝까지 찬찬히 보려고 하지 않는데, 그것은 매우 전략적인 행동 양상이다. 떠다니는 먼지의 양상, 지나가는 개미,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손톱 끝에까지 관심을 모두 두며 살다가는 세속적으로 가치 있다고 평가되는 일은 하나도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에 대해서도 비슷한 행동 양상을 보인다. 읽는 행위와 사는 행위, 그 책에 대해서 말하는 행위를 촘촘히 일치시키지 않고, 갈대로 간이 통발 엮듯이 ‘듬성듬성’ 해치우는 것이다. 이는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에 나오는 사서가 말한 ‘총체적 시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장군님! 제가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모두 알 수 있는지 궁금하지요? 장군님께 말씀드리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책도 읽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중략)
“책의 내용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도서관에서 일하긴 글러먹은 사람이오! 그는 절대로 총체적 시각을 가질 수 없단 말입니다!”
호흡을 멈추고 내가 물었지. “그렇다면 당신은 이곳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거요?”
“전혀. 단지 카탈로그만 볼뿐이죠.”
“하지만 당신은 분명 박사가 아니요?”
-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 중에서, 피에르 바야르,『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p.27. 에서 재인용.
다시 배명훈 소설을 읽은 전략적 독자들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총체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일 수 있다. 이 경우의 총체적 시각이란, 오자 따위가 보이지 않는 시각이면서 동시에 오자만 보게 되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에 나오는 오자 따위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무 쪽이나 책을 펼쳤을 때 오자를 발견하고 출판사에 항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아이러니하면서도 복잡 미묘 단순한 독서계의 한 양상을 목격한 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토록 우악스럽고 엄벙덤벙 대면서 시간에 쫓기듯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와 가장 상반되는 성질의 행동 양상인 ‘독서’를 하고 있다니, 이 세계란 얼마나 신비로운 곳인가!
위의 말은 절대 비아냥대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도 근래의 행태가 거의 그와 유사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나는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코미디북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이런 웃긴 생각을 할 수 있다니 피에르 바야르는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 책을 실용서로 여기고 있다. 그 책은 실천을 위한 책이다.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고, 책에 대해 아는 척해야 할 상황도 너무 많다. 특히 학문계나 예술계의 ‘활자 생산’ 업무에 종사 중이라면 더 그렇다. 나 스스로가 활자를 채집하기 위해 대충 얽은 갈대 통발을 끼고 다니는 어부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다지 ‘대중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읽지 않을 책을 사는 사람들이 더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읽지 않을 책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라면 프레데리크 루빌루아가 『베스트셀러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추적한 바 있다.
이 책의 제3부 ‘독자, 왜 베스트셀러를 구입하는가’ 챕터는 독서 시장에서 생산자와 판매자로 활동하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인데(줬을 것인데), 그중에 ‘9 의무적인 독서’ 챕터의 소제목 ‘정치적 바이블들’에는 사람들이 왜 읽지 않을 책을 사는지에 대한 비교적 명확한 해답이 들어 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나치당의 정치적 부상과 더불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해 나치가 본격적으로 ‘배포’하기 시작하며 어마어마한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책을 읽으려고 산 사람은 거의 없었다. 책을 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샀거나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이런 베스트셀러의 운명은 대개 유사하다. 그런 책은 사람들이 사기는 하지만, 거의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책을 인쇄해 배포하는 목적이 읽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치 체제로서는 독일인들이 체제의 근거가 되는 빈약한 교리를 잘 아느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체제는 그 책을 읽으라고 배포한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식별의 표지로, 자신을 적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소유하고 내보이라고 배포한 것이다. 그 증거로, 1944년 말까지 출간된 『나의 투쟁』 1,245만 부 가운데 800만 부가 전쟁 중에 나왔다.
- 프레데리크 루빌루아, 『베스트셀러의 역사』 pp.235~236.
읽지 않는 책은 일종의 ‘완장’ 같은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패션아이템으로서의 ‘브로치’ 같은 구실을 하기도 한다. 다음은 ‘장식용 책’에 대한 구절이다.
1985년, 『더 뉴 리퍼블릭(The New Repulic)』의 영악한 기자 마이클 킨슬리는 진상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전대미문의 술수를 고안해 낸다. 그는 워싱턴에서 사람들로 붐비는 서점 몇 곳에 들어가, 베스트셀러 코너에 꽂혀 있는 수십 권의 책 속에 ‘이 번호로 전화를 거는 모든 사람에게 5달러를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이 인쇄된 카드를 슬그머니 끼워놓는다. 전화를 거는 사람은 그 카드가 끼워진 쪽까지 읽었다는 것이 증명될 테니까. 결과는 이렇다. 카드를 끼워놓은 책들은 금방 다 팔려나갔지만, 전화를 걸어 5달러를 요구한 구매자는 없었다. 따라서 킨슬리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그 책들은 읽히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논평, 토론, 집계, 그리고 물론, 구매와 소유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중략)
콩쿠르 형제는 이렇게 썼다. “집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는 책들이 있다. 가장 많이 팔리지만 가장 적게 읽히는 것이 바로 그 책들이다.” 2007년 영국에서 4,000명을 대상으로 시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콩쿠르 형제가 의심한 것처럼 조사 대상의 55퍼센트가 오직 장식품으로서 책을 산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 프레데리크 루빌루아, 『베스트셀러의 역사』 pp.265~267.
사다만 놓고 읽지 않는 책의 비율은 픽션의 영역을 벗어날수록 더하다고 한다. (픽션을 쓰지 말아야 하나? 내가 손대는 분야마다 상업적 전망이 안 좋은 건 왜지? 덜 팔리고 ‘진짜 읽는’ 인구가 존재하는 분야에 있다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하나?)
스티븐 호킹의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Briefer History of Time)』가 프랑스에서 거둔 경이로운 성과를 나열한 뒤에 따라붙은 서술 부분은 사람들이 어째서 ‘읽지 않을’, 혹은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책을 구입하는가에 대한 명쾌한 해설과 같다.
데이비드 블럼은 이 문화적 현상에 바쳐진 『뉴욕 매거진(New Yor Magazine)』의 한 기사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지적한다. 스티븐 호킹이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과 끝내는 순간 사이에 끝없는 시간이 흐른다는 물리학의 일반 법칙을 그 책에 인용하는 것을 깜빡했다고. 그 기자는 같은 의미로 매주 그 책을 20부씩 파는 덴버의 한 서점 주인의 말도 인용한다. “그 책을 프로그램에 넣는 지역 북 클럽도 있어요. 하지만 전 그 책에서 뭔가를 이해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트집 잡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죠. 사실, 사람들은 그냥 그 책을 가지고 있기를 원해요.”
- 프레데리크 루빌루아, 『베스트셀러의 역사』, p.269.
뉴튼의 『프린키피아』 재출간본이 성공을 거둔다거나 양자역학에 대한 서적들이 줄줄이 팔려나가는 것은 책의 ‘완장’화와 ‘브로치’화가 중첩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근래의 SF 열풍이나 이과 선호 현상, 박문호 박사의 빅히스토리 인기 현상 등이 모두 같은 맥락 아닐까? 땅이 평평하고 지구를 중심으로 세상이 돈다고 믿는 종교적 인간에 대립한 ‘과학적 인간’이라는 자신의 노선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런 것도 읽는다’는 과시를 하고 싶은 심리 말이다.
노파심에 첨언하자면, 이 글에는 비판의식이 1도 없다. 그게 뭐 나쁜가? 그게 사람인데.
『베스트셀러의 역사』는 여러모로 통찰을 주는 서적이지만, 대상으로 다루는 베스트셀러들이 영미권 서적이라는 데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우리 독서 생태계만의 독특한 점들이 있을 터인데, 영미권의 사례들로 보편성을 추출해 퉁쳐 버리기에는 찜찜함이 남는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천정환·정종현이 저술한 『대한민국 독서사』를 추천하고 싶다. 책의 판형이 깜찍하고 양장본인 데다가 디자인이 매우 깔끔하고 예뻐서 서가에 꽂아두기도 좋다. 읽지 않을 책으로 소비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물론 내용도 좋은 책이다.
이 책은서문에 우리가 ‘베스트셀러’에 대해 추측할 때, 혹은 ‘베스트셀러론’에 접근할 때 유념해야 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왜, 어떤 책이 폭발적으로 많이 팔리고 읽힐까를 중심으로 ‘베스트셀러 요인’을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맥락의 문제로 봐야 한다. 길게 읽히는 책(스테디셀러)과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많이 읽힌 책(베스트셀러)들은 한 시대와 해당 사회의 지배적 심성구조나 정동 등을 보여준다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과연 책의 어떤 요소가 그렇게 한다는 것일까? 책의 ‘내용’인가? 흔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단순한 생각일 것이다.
흔히 ‘베스트셀러(가 되는) 요인’을 분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 요인이 반드시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베스트셀러와 ‘베스트셀러 문화’를 이해하는 핵심일 것이다.
(중략)
그러하기에 어떤 책 상품(사실 영화나 기타 문화상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의 흥행 요인을 텍스트 내·외부의 요인으로 나누어 기술하는 것이 많은 난점을 초래함을 알 수 있다. 수용과 흥행 요인들의 운동, 또는 텍스트 내·외부의 요인이 작용하는 변증법적인 것이다. 양자는 각각 서로 상관없이 운동하기도 하는 심급을 갖고 있지만, ‘수용’의 과정이란 곧 양자를 상호작용하게 강제하는 것이다. ‘수용’이 없는 공간에서만 텍스트 내부와 텍스트 외부는 서로에 대해 독자적이다.
- 천정환·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pp.21~23.
읽지 않는 책, 읽지 않을 책에서조차 텍스트 내부와 외부는 변증법적으로 작용한다. 『프린키피아』 재출간본의 표지에 ‘F=ma’라고 떡하니 박아놓은 이유가 뭐겠는가? 텍스트 내부가 아무 관련이 없다면 꽃을 그려놔도 상관없지 않을까? 대리석 무늬에 금박 꽃잎도 좋겠다. 어떤 식으로든 책이 ‘고급지다’는 느낌만 줘도 되지 않을까? ‘F=ma’에 960페이지, 66,000원을 지불하겠느냐의 문제와 내용을 알 수 없는 대리석 무늬 벽돌책을 사는 문제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에는 분명히 텍스트 내부가 존재하고 있다. 다만 그 ‘내부’라는 것이 텍스트 외부와 작용할 때, 책이라는 물성에 매겨지는 가치를 변동시키는데, 그 변동폭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크다는 점 때문에 독서가와 저술가들의 어안이 벙벙해지는 일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텍스트 외부와 내부의 상호작용을 ‘수용의 과정’이라고 분석한 천정환, 정종현의 이야기는 책을 저술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쩔 수 없이 겸손하게 만든다. 특히 픽션을 저술하려는 사람의 마음은 더 그러하다.
픽션을 저술하는(저술하려는) 사람으로서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읽을 때마다 씁쓸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있는데, ‘문학예술’이라는 분야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1884년, 베를렌은 『저주받은 시인들』에서 말라르메, “성공과 영광을 몹시 싫어해서 그 두 바보짓거리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트리스탕 코르비에르, 그리고 “심지어 코르비에르보다 그것들을 더 혐오해서 아예 시를 출간하지 않으려고 했던” 랭보에게 경의를 표한다. (중략) 천재성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천재성 때문에, 대단히 ‘세기말적인’ 이 만신전에서 진정한 시인은 워스트셀러, 성공에 손을 빌려주는 것을, 대중과 조금이라도 연루되는 것을 거부하는 자이다. 다른 작가들은 돈을 위해서 예술과 사상을 배신한 매문가(賣文家)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이 문학관은 작가 역시 읽히기를 욕망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춘다.
- 프레데리크 루빌루아, 『베스트셀러의 역사』, p.102.
소설가는 비소설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들과는 다르게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기 일쑤이다. 물리학자나 사상가는 노벨상이라는 명예를 획득하는 순간 저술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명예가 판매고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그러나 소설 분야는 약간 다르다. 책을 많이 팔아 돈을 벌거나 문학상을 받아 명예를 취득하는 일 중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노벨상이나 문학상을 받으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 예측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홍보용으로 서점에 뜨는 문구들과 실제의 거래량을 혼동하면 안 된다. 상을 받았다고 확 팔리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 상의 영광이 판매고에 미치는 영향도 그렇게 오래가는 것 같지 않다.
진짜 좋은 문학 작품은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꾸준히 일정량이 소비되는 소설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양귀자의 소설(『모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복간되자마자 샀는데, 그런 나 자신을 통해 소설의 소비 양상에 대해 한 번 더 느꼈다. 내 책장의 낡아빠진 책을 깔끔한 새 책으로 바꾸고 싶어지는 이유는 ‘진짜 읽기’ 때문일뿐더러 ‘계속 읽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라면 접근 가능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 책장에 굳이 둘 이유가 없다.
『베스트셀러의 역사』와 『대한민국 독서사』를 보면, 문학상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는커녕 그 반대의 현상이 더 빈번히 나타난 것 같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문학상 기회를 박탈당하기 일쑤였다. ‘문학상을 타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지만, ‘베스트셀러가 되면 문학상 기회가 축소된다’는 인과관계가 분명히 있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명망이 높든 그렇지 않든, 문학상은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상들은 대중에게 한정된 영향력밖에 미치지 못한다. 판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저자가 거둔 대중적 성공이 상을 타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일도 잦다. 예를 들면, 1901년에는 졸라가(상은 독자들이 거의 읽지 않는 시인인 음울한 쉴리 프뤼돔에게 돌아갔다). 1938년에는 마거릿 미첼이(『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엄청나게 팔렸지만, “위대한 예술은 아니죠”라고 한 스웨덴 심사위원은 논평했다.), 1948년에는 콜레트가 (“그녀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진지하게 고려될 수 없는 수준에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 자신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는 또 다른 심사위원은 이렇게 거드름을 피웠다.) 이미 거둔 대중적 성공 때문에 노벨 문학상을 타지 못했다. (중략)
간단히 말해 문학상과 베스트셀러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 프레데리크 루빌루아, 『베스트셀러의 역사』, pp.250~251.
이런 현상이 국제적인 것일 뿐, 책 판매량이 쥐꼬리만 한 대한민국은 나름의 특수성이 따로 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다음 예를 보라.
최인호와 당시 문단의 관계도 흥미롭다. 애초에 문지와 창비는 뛰어난 문재를 가진 이 엘리트에게 각각 호감이 컸다. 특히 비평가 김현은 《문학과지성》 창간호에 〈술꾼〉을 재수록하고, 비평으로 최인호를 지원했다. 그러나 그의 상업적 대성공은 ‘순수·본격’을 지향한 문지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다. 일약 대스타가 된 최인호를 만난 김현은, 당신이 너무 대중적으로 성공하는 바람에 우리 입장이 곤란해졌다면서 계속 대중소설가의 길로 갈 건지 따지듯 물었다. 최인호는 당연히 반발했다. 그리고 창비도 먼저 최인호에게 투고를 요청했는데, 그가 투고한 〈미개인〉이라는 소설을 싣지 않고 뭉개다가 ‘사회의식이 약하게 표현됐다’며 ‘더 세게’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최인호는 화가 나서 다시는 창비에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다.
- 천정환·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pp.143~145.
최인호가 당시 김현을 만나서 화를 내며 한 말의 내용에는 어떤 문학상에도 자기 작품을 올리지 말고 문학상 심사에도 들어가지 않겠노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해당 내용을 읽은 서지는 기억이 가물거린다.) 최인호는 정말 자신이 내뱉은 말대로 인생을 살다가 마쳤다. 그는 한국의 문학상을 쥐락펴락하는 문단 관계자들보다는 영화계와 더 친밀하게 지냈다. 그 모든 일이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이 대중적·상업적으로 너무 큰 성공을 거두어 생긴 부수적 현상들이었다. 대한민국이야말로 대중성을 빌미로 고고한 문학성의 세계에 트럼프 장벽을 치는 문학계 인사들이 포진해 있는 곳이다.
최근에 나는 정보라의 『저주 토끼』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현상에 대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책이 문학상 ‘후보’에 올랐지 상을 받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본심 진출작이라는 것은 엄청난 명예이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대한민국의 리얼리즘 기반 주류 문학계에서 변방으로 내쳐져 있는 장르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에 진출한 것도, 후보가 된 것도, 모두 한국의 주류 문단과 출판계의 조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게다가 상을 탄 것도 아니고 후보가 되었을 뿐인데 어째서 판매량이 상승하는가? 이것은 그저 이 책이 ‘잘 읽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애초에 베스트셀러가 될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출판 시장의 범람하는 생산물들 사이에서 돋보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독서계의 많은 양태들을 조소를 띤 채로 바라보는 사람이지만, 이 현상에 대해서만큼은 흐뭇함을 감출 수가 없다. 신은 때때로 실수를 하여 ‘진심’으로 사는 인간을 기쁘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성과가 해외문학상을 통한 것임을 상기하고, 『저주 토끼』가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문학성'을 운운하는 국내 평론계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안 보이는 현상을 마주하면 좀 씁쓸해진다. 역시나 이 업계는 양손에 떡주무르는 것을 지독히도 꼴 보기 싫어하는 곳인가?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자. 근래에 나는 인스타그램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인스타에 올라온 각종 출판사, 서점, 작가의 새 글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베스트셀러의 역사』에서 읽은 한 대목이 떠오를 때가 있다.
“어떤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서 그것이 이미 베스트셀러라고 믿게 만드는 수단”(p.165)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인 이유를 나열해 보면 한도 끝도 없거나 영원한 미궁에 빠질 때가 많다. 텍스트 내외부의 변증법적 고찰이니 책을 둘러싼 총체적 시각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고함을 쳐대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이유의 90퍼센트는 그 책이 이미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이다. 그다지 복잡한 이유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팔리고 있으니 계속 팔린다.
※ 이 글을 쓰게 만든 씨앗은 2022년 한국과학문학상 대상 수장 작가인 ‘서윤빈’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이었음을 밝혀 둡니다. 앞으로 이 분이 무엇을 쓰든지 책을 사줍시다. 안 읽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