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로드에 새 소설 연재를 시작해 정교한 사고가 담긴 글을 쓸 여유가 없다.
아래는 휴대폰 노트에 저장된 예전 일기 토막들이다.
마지막은 오늘의 일기.
중독. 환청. 불면의 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정확한 진단을 내려준 적이 있다. 아마도 내 가방이 투명pvc 재질로 된 여름용 토드백이었던 탓일 거다. 그가 내 가방 속을 빤히 보았다. 빤히 보이도록 해두었으니 당연했다. 내 가방 속에는 전자책 리더기, 시사잡지, 종이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는 몰랐겠지만 내 핸드폰에는 월정액 전자책 플랫폼 서비스까지 있었다. 약속장소에 일찍 도착하면 읽으려고 가져온 것치고는 너무 많았다. 게다가 약속장소는 우리집 바로 길 건너 커피숍이어서 걸어서 1분 거리였다.
"읽을거리가 떨어지면 불안해요."
나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답했고 그가 빠르고 명쾌하게 진단을 내렸다.
"활자 중독이시네요."
그건 너무 뜻밖의 말이었고 처음 듣는 말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 명백한 진실을 어째서 나는 이제껏 모르고 살았으며 누구도 내게 말해주지 않은 것인지, 어째서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그 진실을 처음 듣게 된 것인지 너무 의아해서였다.
나는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어딘가에 대책 없이 푹 빠지지 않고 살았다고 여겼다. 그게 스스로를 보호하며 산 방식이었다. 내 삶은 태어날 때부터 상처받기 쉬운,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요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회의주의, 냉소적 태도, 겉돌기 같은 정신적 방어는 내 생존을 위한 필수품, 월면에서 버티기 위한 우주복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잡을 끈 없이 버틸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활자에 눈을 박은 채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 숨줄이었다. 나는 내가 그러하다는 걸 몰랐다.
심지어 이 일화는 내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전, 그러니까 대학원에 가기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이미 그랬다. 소설 때문에 활자중독이 된 것이 아니다. 활자중독이었기에 소설을 쓰겠다 덤빈 것이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깨달았다. 내가 활자를 쉼 없이 들이킨 까닭은 내 속에서 들끓는 말들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나의 내면에 타인이 창조한 말들을 들이부어 누르지 않을 때, 고요히 내 속을 들여다보려 할 때면 나는 너무나 경악한다.
거기에는 지옥불 속에서 아우성치는 수백만 입이 있다. 동시에 와글와글 떠드는 말들이 있다. 그것을 받아쓰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엄청난 소음 속에서 가공해 쓸만한 것을 찾으려 애쓴다. 그러다 이내 포기하고 완전히 다른 말들을 창조하려 시도한다. 내가 읽은 말들, 타인이 이미 창조한 말들의 세계를 떠올린다. 기억해 낸다. 변형한다. 그럴싸하다. 나를 외면하는 데 성공한 듯하다. 그러나 마침표를 찍고 보면 배경에 노이즈가 섞여 있다. 내 속에서 들끓고 있는 비명과 고함들이 끼어들어 있다.
그런 작업들 끝에, 그러니까 시행착오에 불과한 과정들을 견딘 끝에, 이제는 내 내면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 한다. 비명과 고함들을 해독해 보려 한다.
아마 이것은 니체가 말한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심연에게 나를 간파당하고 휘둘릴지도 모른다. 진실과 대면하고 아이러니와 모순을 직시했던 선각자들, 끝내 미쳐 버렸던 그 여자들처럼 될지도 모른다. 비명들, 고함들, 듣기 고통스러운 그 발악들.
그래도 들을 것이다. 그래도 볼 것이다. 그래도 받아쓸 것이다.
노이즈. 또 노이즈. 언제나 해독 결과는 구조요청 신호음.
-2023.1.31.
아버지의 얼굴
아버지의 사라진 머리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그것은 비참한 죽음에 대한 애도나 용서 같은 문제와는 조금 다르다. 죽은 사람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신체의 특정 부분이 필요할까 하는 궁금함,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건 머리일 거라는 슬픈 확신이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죽은 그를 용서하지 못했지만 얼굴을 잃은 자를 용서할 권한이 내게 있는지, 그런 권한이 나 아니라도 누구에게라도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 인생의 초반 삼분의 일을 폭력으로 얼룩지게 한 사람. 그러나 사람은 변하고,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더 극적으로 변한다. 재혼한 아버지는 특상품 복숭아 두 박스를 들고 다리를 절면서 갓 둘째 아이의 엄마가 된 딸을 찾아올 줄 아는 남자가 되었다. 나는 그가 달라졌기에 더 싫었다. 어째서 신은 내게 달고 무른 복숭아 같은 아버지는 허락지 않고 내 아들의 할아버지로만 허락했는가, 그때 나는 그토록 속이 좁았다.
삶의 반전은 그 어떤 픽션보다 예측불가능하다. 느리고 옹졸한 내가 용서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는 거대한 트럭바퀴에 머리를 잃었다. 두개골이 터지는 소리가 새벽공기를 갈랐다.
가끔 생각한다. 죽음이 한 사람의 지난 과오를 용서할 빌미를 주기도 한다면, 그때 우리에게 어떤 표정이 필요할까? 죽음을 맞을 때 혹은 죽음을 목격할 때 혹은 죽음이 나를 교화할 에피파니로 들이닥쳤을 때. 바로 그때.
나는 상투적 회개를 거부해 버린 한 남자를 생각한다. 머리를 잃은 모습으로, 자식들의 원망을 담아둘 상징물을 깨끗이 삭제한 모습으로 가버린 남자.
아버지. 당신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 당신을 잠시라도 용서했다면 저는 지금보다 좀 더 오만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요. 저는 끝내 졌고 당신은 이겼습니다. 사라진 아버지의 얼굴을 되찾을 길이 없어 매일 제 얼굴이 당신을 닮아갑니다.
-2022. 12. 10
성장소설이란
성장이란 어제보다 더 큰 내가 되는 게 아니다. 어제와 다른 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포용하는 것이다. 성장하지 않음은 난쟁이로 멈춘 것이 아니다. 변화를 거부하거나 어제의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성장한다. 그들을 창조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성장을 긍정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하는 나에게서 반성과 기회를 억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겪는 것이 퇴화가 아니라 성장이라 믿고 싶다.
-2022.6.20.
전성기와 미래 없음
점쟁이를 찾아가 전성기가 언제 오나 물었다.
그게 지금이야. 한창 돈 벌고 제일 왕성하게 일할 나이잖아.
산꼭대기에 서서 생각한다.
그래 여기가 전성기란 말이지?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단 말이지?
-2021.8.30.
(첨언. 그래서 그 후에 나는 구름을 잡아챘다. 니들이 정한 건 하지 않을 테다. 근두운 타고 날아가버릴 테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자 새 직업이 생겼다. 전성기가 나이로 결정되지 않는 직업이.)
40대의 할 일
40대에 예술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나잇값을 못하는 것인지, 그 예술이 반항적인 색깔이 띠고자 하는 것이 철없는 것인지 생각한다.
예술이 젊은이들의 특권인 이유는 그 나이에는 삶이 저항의 형태를 띠어야 하기 때문이다. 풍자하고 놀리며 노는 것이 그 시절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 시절의 특권이냐면 잃을 것이 별로 없는 때이기 때문이다.
40대가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이미 얻은 것 - 기득 한 것을 잃을 것이다.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에 온순하게 적응하는 대가로 얻은 직업, 평판, 가족, 커뮤니티 같은 것들은 모두 기득권이다.
잃을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혹은 예술하는 척하며 폼이나 잡을 것인가?
-2021.7.17
(첨언. 실제로 나는 데뷔를 통해 사람을 잃었다. 한두 명이긴 하지만, 소설가 지인을 싫어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예술을 싫어하고 자신들이 풍자의 대상이 될까 지레 겁먹은 인간도 있을 수 있다.)
찰스 부코스키, 미시마 유키오, 죽은 예술가와 죽기 싫은 예술가 지망생
20대의 어느 때였을 것이다. 나는 아직 내가 무엇을 하며 살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도 막연히 어떤 소명이 나를 사로잡으리라 기대하며 살았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015B의 정석원이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아마 폐인이 됐을 거라 답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크게 감동했다. 아마 나의 감동 알고리즘은 다음과 같이 기능했을 것이다.
나는 현재 사회의 별 쓸모없는 인재다. 아마 이대로라면 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소명이 나를 사로잡아 구원할 것이다. 마치 정석원처럼. 음악처럼. 글이나 그림이나 뭔가가.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예술을 하는 상태 자체가 폐인에 가깝다는 인지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소명이 나를 사로잡든 잡지 않든, 그 소명이 예술에 전념하는 것이라면 폐인이기는 마찬가지라 여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꼰대 마인드는 나의 삼십 대와 사십 대 초반을 예술과 등지게 했다. 그러나 사십 대 중반인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주부고 여자고 아줌마다. 사회적 지위도 성적 매력도 통장의 돈도 내 명의의 부동산도 없다. 삶을 중반부 이상 지나왔는데, 이 추세대로라면 남은 삶에서 세속적 기준에 부합하는 소명을 완수할 가능성도 그다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폐인으로 간다. 소명이 나를 사로잡지 않는다면 내가 소명을 포획해야겠다.
폐인 아닌 예술가들은 드물고 드무니, 소명을 쥐는 대신 소망을 줄인다. 아무쪼록 오래 살고 싶다. 예술하는 폐인으로 오래 살고 싶다.
-2020.5.8.
<연애 빠진 로맨스> 관람 후기
아주 사소한 일상.
목이 늘어난 티셔츠나 고무줄 빠진 수면바지, 내 친구의 사소한 결점 같은 것을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자기 자신의 중얼거림을 듣는 것처럼 마음을 모아 들어주는 사람은 '애인'뿐이다. 진정한 애인은 귀하고, 평생 만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스물아홉이건 열아홉이건 마흔아홉이건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애인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안' 생기는 것이 절대다수의 현실이고 그래서 우리는 타협을 한다. 당신처럼, 그리고 당신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고 자신의 작은 기쁨에 골몰 중인 당신 곁의 그 사람처럼.
내 지난 사랑을 듣고 기억하고, 자기 마음처럼 쏟아주고, 그의 실수에 여전히 마음이 꽁한 나에게 "따라가도 돼?" 하고 묻는 애인이 있다면 남은 생 모두와 바꿀 수도 있으리라.
이런 태도를 로맨스 아이디얼리스트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잘 만든 로맨스 콘텐츠는 항상 관객(독자)을 로맨스 아이디얼리스트로 만드는 법이고, 때문에 로맨스 콘텐츠를 너무 과하게 소비하면 현실의 연애와 타협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매주 한 편의 로맨스 영화를 보고 서랍에 이혼서류를 넣어두고 살아야지. 타협은 마흔까지 실컷 하며 살았으니까.
이 영화에 대한 반박 혹은 질문.
내게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나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나에게서 성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둘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20대가 지나야 알 수 있다.
-2021.12.6.
현진건신인문학상의 시상식 현장 당선 소감에서 나는 기유빅의 시를 인용해 이런 말을 했다.
"문을 찾을 수 있어 그 앞에서 울 수 있는 자는 행복하여라."
이 시구를 표구하려고 했었다고. 공모전에서 떨어질 때마다 보기 위해서. 적어도 나는 문을 찾을 수 있으니 울어도 행복한 것 아니냐 자위하려고.
문고리를 잡고 당겨주신 심사위원과 선배님들께 감사드리며, 이제 문 안으로 들어왔으니 더 이상 문 앞에서 울지 않아도 되겠다 말했다.
앞으로는 문 안에서 울면 되겠다고.
말이 씨가 되어 문 안에서 울며 살다가 요즘 잠깐 웃고 산다.
밀리의 서재가 새로 론칭한 오픈플랫폼 밀리로드에 내 소설이 전체 9위(소설분야 3위)에 박혀 있다. 좀비 소재가 아직 유효할지는 나도 몰랐네. 이 행복 오래갔으면. (다음 화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는 괴로움은 동전의 뒷면이지만, 괜찮아. 앞면 번쩍번쩍해. 뒷면 견딜만해.)
인생은 예측불가능.
-202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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