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쓰다
종일 아픈 개와 함께 보냈다.
개 나이 열여섯 살이니까 사람으로 치면 팔순을 넘긴 셈이라 아픈 건 일상일 테고, 평소와 달리 이 일에 마음을 쓰다 못해 글로 쓰기까지 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유는 바로, 개주인인 나도 아프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니 외출이 힘들고 그래서 종일 개와 같이 있었다. 종일 같이 있으니, 자는 개를 할 일 없이 오래 들여다 보게 되었다.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늙은 개가 저렇게 자꾸 자는 것은 아마도 아프기 때문이겠지. 깨어 있으면 느끼는 것은 고통뿐이니까, 잠들려고 애써보는 거겠지.
말도 없는 짐승의 속에 이토록 관심을 두는 것은, 그리고 해석을 자꾸 '아픔'으로 끌고 가는 것은 인간이 이기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주인인 내가 아프기 때문에 개가 아프다는 사실에만 자꾸 관심이 가는 것이다.
개는 늙어서 그렇다치고, 나도 안 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만큼 늙은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아프나. 어깨 통증, 허리 통증은 고질적인 것이니, 언젠가 의사가 뼈에 망치질을 해주지 않는 이상 계속 이만큼씩은 아플 테고, 외출도 못하게 아픈 까닭은 다른 데 있었다. 감기 탓이다.
초여름 감기가 참으로 지독하다. 콧물과 가래가 떨어지질 않고, 뇌수가 진득한 슬라임 같은 것으로 변한 기분이다. 몸이 좀 낫자 여러 달 전에 예약해뒀던 건강검진 날짜가 돌아왔다. 아직 목에 가래가 끈끈했지만, 이 정도 컨디션이면 검진은 되겠지 싶어서 날짜에 맞춰 병원에 갔다.
생애 처음으로 수면 내시경이란 것을 해보았다. 수면 내시경이라서 내심 '수면'을 기대하고 갔는데, 내 예상과 상당히 달랐다. 그것은 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는 경미한 불면증을 가지고 있어서 잠들기는 어려워하고 잠에서 깨는 것은 매우 힘들어 한다. 그래서 늘 자기 전에 책을 읽다가 잠들곤 한다. 내가 아는 잠이란 그런 거였다. 노곤하고 피곤하고 지친 느낌인데 온갖 잡다한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다가 어느새 꿈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그에 비해 수면 내시경의 '수면'은 이런 식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진료 하나만 더 보고 오신대요. 잠시만 더 대기 가능하신가요?"
간호사가 물었고, "네"하고 답했다. 나는 말똥말똥했고 잠시 후에 의사가 왔다.
"오셨네요."
그리고 깜깜.
"어, 안 일어나셔도 돼요. 어지럽지 않으세요?"
"어지럽습니다."
"네. 그럼 더 누워 계세요."
"네."
깜깜.
이 깜깜 부분을 어둠이 밀려온다든지 세상이 암흑에 잠긴다든지 하는 식으로 상상해선 곤란하다. 이 부분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면 '내 존재가 사라진 느낌'에 가깝다. 내가 없었고, 짠, 있어졌다가, 더 누워있으라고 해서 눈을 감았더니, 순식간에 내가 없어졌고, 짠, 다시 내가 생겼을 때, 일어나서 옷 갈아입으러 가도 된다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식이었다.
야, 이거 신기한데?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는 것 같아.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수술 마취 경험이라면 3번 정도 있었다. 그것은 술을 잔뜩 먹고 쓰러진 뒤 일어나는 것과 비슷했다. 마취에서 깼을 때 지독한 고통이 밀려왔고 카테터에 연결된 정맥용 진통제가 빨리 몸에 들어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수면 내시경 같은 것이 아니었다.
수면 내시경의 스위치 수면을 잠시 겪고 나서 그 날 하루종일 아주 편안하게 보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편안했다. 기침과 콧물은 계속 됐지만, 어딘지 모르게 편안했다. 수면 내시경 이틀 뒤 쯤에 아픈 개가 자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깨달았다.
내가 왜 핸드폰이 아니라 아픈 개를 보고 있는 거지?
나의 편안함의 원인은 '불안의 제거'였던 것이다. 항상 쫓기는 듯이 불안했고 무엇인가 분주히 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자주 궁금했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전업 작가'를 빙자한 '실직' 상태가 계속되자 불안이 내 등 뒤에서 다가와 나를 잠식해 들어갔다. 집중력이 떨어져서 책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힘들었고, 글을 쓰면 문장이 꼬이기 일쑤여서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기 위해 긴 시간을 끙끙대야 했다. 자기 전에 보던 종이책은 휴대폰 속의 전자책 앱으로 바뀌었고, 자주 전자책 앱에서 뛰쳐나와 SNS를 기웃대다가 돌아가곤 했다. 잠자리에서 분주해질수록 아침이 너무 힘들었다. 아이들과의 일상을 위해 강제로 일어나면 거의 잠을 안 잔 기분이었고, 오전에는 대체로 졸았다.
그런데 수면 내시경으로 한숨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마음이 편안해져 있었다. 세상이 고요했다. 책 한 권을 이틀 만에 다 읽었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선명하게 났다. 감동도 받았다. 읽으며 웃기도 했고 슬퍼하기도 했다.
아, 이래서 연예인들이 프로포폴을 하는구나.
어쩌면 나는 불안이 아니라, 불안에서 비롯된 질 낮은 수면에 잠식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뇌의 스위치를 끄고 온전히 쉬게 해주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자면서조차 쉬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온전히 쉬고 나자 쉬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뇌가 스스로 일상을 조절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적당히 멀리하고 고요한 평정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완전히 멀리할 수는 없다. 요새는 대부분의 '의무'들이 휴대폰 앱으로 공지되고 있다.)
푹 쉬기 위해 다같이 수면 내시경을 하자,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자자기 조절 능력이 모자란 사람, 나 같은 사람에게나 필요하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도 본질을 한 번에 깨달았다. 자기 위해 프로포폴을 찾지는 않을 것 같다.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종일 잠을 붙들고 있는 노견에게 시선을 주고 잠 속에 든 아픔을 함께 느끼는 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여유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여유는 망중한에 마시는 커피나 하늘 보기 같은 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잠든 개를 보는 것도 여유의 카테고리 안에 있다. 산책을 시켜주거나 안약을 넣어주거나 발톱을 깎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는 것 말이다. 고요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대상은 해야 할 일들을 덩어리가 아니라 아픔을 함께 느끼는 존재로 변한다.
늙어가는 개가 내 마음에도 한 마리 살고 있다. 개가 아프면 잠시라도 푹 재워 주어야 한다. 푹 재워주는 방법이란 별것도 아니다. 스위치를 끄면 된다. 환하고 현란한 것들을 잠시 꺼두는 것. 껐다 켜면 지저분한 불안과 걱정들이 지워져 있을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 속에 있는 아픈 개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밤이야. 불 끄자. 내일 봐.
오늘의 너 말고, 내일의 너로 보자. 푹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