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쓰다
부동산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며칠 전에 대학 시절의 노(老)은사를 뵈었다. 요즘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더 외로워했다. 그분도 다를 바 없었을뿐더러, 내가 보기에 그분은 20년 전에도 표나게 외로워하시는 분이었다. 지난 20년간 외로움에 이골에 나서 덤덤해지신 것 같지는 않았다. 외로움 덩어리를 밑천 깔아둔 덕에 20년간 차곡차곡 복리 적금을 부은 듯이 외로움이 쌓인 듯했다. 그러니 저녁 메뉴 족발에 반주로 곁들인 소주잔을 붙들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천천히 가. 집에 가면 뭐해? 부부가 만나면 부동산 이야기나 하지.”
“저희 부부는 부동산 이야기는 잘 안 해요.”
“그럼 주식 이야기를 하겠지.”
“그건 해야겠네요. 몰래 하다가 들통나면 더 곤란하니까.”
우스개처럼 주고받은 대화였지만, 집에 돌아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대화 속에는 늘 곁에 두고도 잘 보이지 않았던 삶의 한 단면이 드러나 있었다.
우리 부부가 부동산 이야기를 잘 안 하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부동산에 별로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왜 관심이 없어졌냐면, 지긋지긋하던 대출 이자를 다 갚고 내 집에 지박령처럼 들러붙어 있던 은행 지분이란 놈을 쫓아내 버렸기 때문이다. 온전한 내 집이 생기고 나서 우리는 부동산 자체에 큰 관심이 없어졌다.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글만 쓰겠다고 작정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대출 이자라는 짐을 처분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우리 부부는 캠퍼스 커플로 만나서 쥐뿔도 없는 상태로 결혼을 했다. 정말 쥐뿔도 없었다. 우리가 결혼할 때 풍속으로는 쥐도 전세보증금 정도의 뿔은 가지고 신접살림을 시작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처가살이로 시작했다. 겁이 없었던 것인지 무모했던 것인지……. 사랑만 믿고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7년이나 연애를 한 뒤라 불타는 열정도 없었고 신혼여행지에서 하마터면 이혼 도장을 찍을 뻔하기도 했다. 싸울 일이 너무 많았다. 지금 같으면 그런 시작은 못할 것 같다.
우직하게 살았다. 아껴 쓰고, 한 푼이라도 벌어서 저금하고, 목돈이 조금 모이면 최고 효율이 나는 곳에 투자하고, 금리가 쌀 때는 과감하게 빚을 내고 주택을 구입하는 모험도 한 끝에 결혼 15년 만에 지방도시에 작은 아파트 하나를 온전히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는 당연히 부동산 이야기를 많이 했다. 너무너무 관심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건 재미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생존’과 ‘과업 달성’을 위해 꾸역꾸역 해내야 하는 대화였다. 단 하루, 결정적인 순간에 번쩍 역기를 들기 위해 매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선수처럼 부동산에 대한 대화를 하며 살았다.
나는 이런 내가 조금 유별나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주변인과 부동산 이야기나 주식 이야기를 할 때의 나는 헬륨 풍선이 땅에 붙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동산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하고 살던 시절에조차 친구나 동료, 학부모들과 부동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지루했고 시간 낭비같이 느껴졌다. 그 주제로 대화를 자주 나눴던 상대도 아주 한정적이었는데, 남편과 공인중개사 일을 하고 있던 친구 한 명뿐이었다. 두 사람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사실상 ‘정보’를 나누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의 의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부동산으로 자산을 불릴 수 있는 확실한 정보를 원했기 때문이다.
대개 부동산을 빌미로 나누는 대화들에는 진짜 정보가 없었다. 정보를 가장한 과시나 허세, 공통 관심사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교’ 기능을 수행할 뿐이었다. 부동산에 대한 진짜 정보는 신문과 서적, 공인중개사 사이에서 거래되는 실제 거래액과 시장에 나와 있는 물건들에서 나왔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정보의 대부분은 미끼였고, 전화를 걸고 직접 찾아가서 확인한 정보만이 진짜였다. 그러나 점심시간을 전후로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출처나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 대다수였고, 이미 지나간 사건들에 대한 과장 섞인 자랑이기 일쑤였다.
그런 식으로 (부동산에 대한 실질적 정보 취득 없이) 부동산 토픽을 빌미로 사교를 하는 것이라면, 소설이나 고전 인문학 서적의 문장을 들먹이면서도 충분히 사교를 할 수 있을 텐데(꼭 책을 몽땅 읽을 필요도 없잖아? 정보가 인터넷에 널려 있는데), 그런 사교를 하려는 사람들은 주변에 거의 없었다. 책을 빌미로 한 모임을 찾아내 여러 수고를 감내하고 가 보기도 했지만, 그런 곳에는 내 또래가 거의 없었다. 모임원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아이들도 장성했기 일쑤였다. 아니다. 간혹 나보다 어리거나 내 또래이지만 나와 다른 유형의 삶을 사는 이를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럴 때는 어김없이 내가 ‘꼰대’가 되었다. 그들은 내가 보기에도 대책 없이 날아다니는 헬륨 풍선들이어서 ‘그러다가 굶어 죽으실 수도 있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오르내렸다. 그때는 내가 그들과 약간은 다르다고 생각했고, ‘나는 저 정도 뜬구름은 아니다’라고 믿었다.
근래에 소설가들을 자주 접하고 살면서 ‘헬륨 풍선’으로 사는 사람들이 내 생각만큼 소수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온전한 가정에서 적당히 따뜻하게 지냈다면, 내가 결함을 지닌 인간이라 여기지 않았다면, 혹은 그 결함을 메우기 위해 일찍 결혼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그들처럼 살았을지 몰랐다. 이제서야 스스로에게 솔직해졌는데, 나 역시도 부동산과 금리 이야기가 나오면 지루함이 밀려들면서 정신이 외우주로 멀리 날아가 버리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차라리 보바리 부인이나 채털리 부인, 심시선 여사 이야기가 나오면 신경세포들이 깨어나 수군거린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화’라는 것을 하고 있구나 자각하게 된다. 그런데 뭐, 그런 이야기를 할 일이 자주 있나? 앞에 등장한 은사님과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읽은 책이 겹치지도 않았고, ‘그 책 재미없더라’를 ‘재미있던데’로 받아치면 그 토픽은 끝나 버렸고, ‘그 작가 잘 쓰더라’를 ‘그분 원래 잘 써요.’로 받아쳐도 토픽이 끝나 버렸다. 그래도 부동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무 말이나 우스갯소리를 하는 편이 더 나았다. (사실 나는 부동산 공인중개사를 하는 친구를 만나도 부동산 이야기보다는 우스갯소리를 더 많이 나누는 편이었다. 공인중개사 세계의 웃픈 경험담을 듣는 편이 객관적 정보를 듣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오늘 오전에 오랜만에 남편과 부동산 이야기를 했다. 남편이 휴가를 내고 할 일 없이 집에 있었던 것도 이유였고, 남편의 직장 동료가 부동산을 구입한 것도 이유였지만,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벤티 32oz 커피를 둘이서 나눠 마시며 나눌 대화가 딱히 없어서이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핸드폰으로 지도를 꺼내 놓고 들여다보며 실거래가까지 조회하는 토픽이었지만, 나는 남편에게서 ‘그 누군가’의 투자 사례를 전해 들으며 외우주 어딘가를 헤맸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마디를 남겼다.
“도박이네.”
사실 그 거래는 투자보다는 도박에 가까워 보였다. 조합 방식의 재건축이라는 게 흔히 그렇지 않나. 현금이 너무 많아서 낡아 쓰러져 가는 구식 아파트에 박아두고 없는 셈 칠 돈이 있다면 또 모를까. 그래서 뭐? 도박이면 잃거나 따겠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예전과 달리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나를 본 남편이 부동산 토픽을 접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대구로 이사 갈까?”
“아니, 뜬금없이 왜?”
“평생 여기서 살 순 없잖아?”
“난 평생 여기서 살 것 같은데?”
“그런가? 근데 왜?”
“이제 겨우 내 집인데 이걸 두고 어딜 가겠어? 대구 집값 엄청 올랐어. 이 사람이 세상 물정을 모르네.”
남편이 김빠진 사이다 같은 표정이 되더니 돌아서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네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다. 사는 게 심심하니까 그러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말려들 줄 알고. 덜 심심하려고 욕심 부리다가 손에 든 것까지 놓치는 수가 있어.’
그렇게 나는 나대로 돌아서서 내 방으로 왔다. 삼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작고 아늑한 내 방. 나를 헬륨 풍선으로 만들어주는 책들로 가득 한 방. 그곳에서 지금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그에 대한 약간의 미안함 때문에 시작하였다.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고, 매일 비슷한 대화를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붙이고 살아야 하는 것은 그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좀 덜 지루하다. 그는 모르는 내 부동산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정말 신비롭다. 2㎥ 남짓일 작은 공간이 무한히 확장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지구 반대편에 갔다가 오늘은 18세기 언저리를 헤맸다. 나는 ‘서재’라는 작은 부동산에 매일 ‘독서 시간’을 투자하는 중이다.
재건축 아파트 이야기를 피해 서재로 도망친 나는 볼테르의 《캉디드》를 마저 읽을지, 도서관에서 빌려온 이반 일리치의 《젠더》를 마저 읽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후자가 나을 듯하다. 지난 주말에 입은 각막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 전자책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기가 아직은 부담스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