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들은 다음과 같다.
르네 지라르, 김진식 옮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문학과지성사, 2004.
이반 일리치, 허택 옮김, 젠더, 사월의책, 2020.
김내훈, 급진의 20대-k포퓰리즘-가장위태로운 세대의, 서해문집, 2022
이 세 권의 책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빌려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손이 닿는대로 툭툭 빌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책들을 연달아 읽는 동안 굵은 동아줄을 붙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책이 바뀌었는데 생각의 줄은 여전했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사상은 언뜻 굉장히 급진적인 듯 보이지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고, 그 책에 있는 그의 사상에는 매우 경도된 적 있는데, 이번 책은 참으로 애매했다.
그가 진단한 성불평등의 현상들은 꽤나 날카롭고 정확했다. 산업에서 전통적 젠더 구분의 영역이 파괴되고 하나의 파이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이다. 여성적 영역의 노동은 착취될 수 밖에 없는데, 공유지의 사유화(자연의 점령)를 행하며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가진 속성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그림자 노동>의 쟁점과도 연결되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젠더가 사라지고 '성'만 남은 사회에서는 성이 차별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주장이 계속 출몰하자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의 경제사회적 룰에서는 성평등을 실현시킬 수 없으니, 젠더 갈등과 성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량생산과 소비적 생활을 포기하고 자급자족적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듯이 모호하게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황당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런 주장을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정치적 주장도 과격화되면 모두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공교롭게도 그 다음으로 펴든 책이 김내훈의 <급진의 20대>였다. 책에서도 말하다시피 지금의 20대~30대는 상당히 우편향의 정치색을 띄고 있으므로 그들을 진보적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과격하게 차이보다는 차별을 옹호하고 기득한 이익을 지키기 위한 납작한 공정성에 목소리를 높인다. 제목에서 말하는 '급진'은 20대에서 찾기가 힘들었다.
이래 저래 생각만 어지럽혀진 상태였는데, 르네 지라르의 글을 읽으며 상당히 통쾌하다고 느꼈다. 르네 지라르는 성서와 신화라는 단 두 가지 텍스트 분석을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환하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역사적이고 문화인류학적인 사례들을 줄줄이 끌고 와서 젠더 이분법 문화의 역사성을 공고히 하려 들었던 이반 일리치나 현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있지만 어쩐지 답답한 어장 속을 뱅뱅 도는 것 같은 김내훈의 책보다 훨씬 통쾌한 책이었다.
르네 지라르는 시종일관 인간의 '모방' 본능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는데, 그 돋보기는 상당히 유용하고도 다재다능한 도구이다. 신화가 모방적 폭력을 옹호해서 만장일치의 정치지형, 희생제의에 의한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반면, 성서는 모방적 폭력을 억제하고 만장일치의 폭력성을 경고하며, 희생양이나 속죄양에 의한 카타르시스를 '근심'한다는 것이다. 대개 현대 정치 윤리에서는 후자를 '진보'라고 정의한다고 나는 믿는다. 보수적 정치색을 지닌 집단에서 희생양, 증오, 혐오를 빌미로 한 협력과 단결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급진의 20대가 과격한 '진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과격하긴 하지만, 급진적이라기보다는 극단주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혼인에 의한 일부일처제에 반대하며 성해방 실험을 주장하든지, 사회적 분배를 '보이는 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주의 실험을 하자고 하든지, 뭐라도 지금 있는 체제가 놀라 자빠질 대안을 내놔야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능력주의에 의거한 사회적 차별을 옹호하는 주장들이 무슨 급진이란 말인가. 그저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의 유불리를 따져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를 낮은 계층으로 인식한 청년 남성에서 다른 집단들보다 '기회가 되면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도울' 경향이 가장 높다는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들이 특별히 '착해서' 그렇다기보다 서로 도울수록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위 계층일수록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돕는 행위, 혹은 그러한 의향을 밝히는 것을 위선으로 간주한다. 그들의 생각에,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은 노력을 덜한 사람들이다. - 김내훈(2022), p.52.
지금의 20대들이 설문조사에서 뻔뻔스러울 정도로 반위선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 조금 놀랍긴 하지만, 그것이 인간 역사에서 새로이 등장한 경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근래에 볼테르의 <쟈디그>를 읽었는데, 그 글에서 쟈디그는 개가하려는 과부를 비난하던 아내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죽은 척하는 연극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직접 그 처지가 되어 보지 않고는 타인을 이해하기 힘들며, 타인에게는 유독 엄정하고 잔인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게 마련이다. '내로남불'의 심리가 도덕으로 변태하면 '반위선' 정서가 되지 않나 싶다. 남의 일에는 보편 도덕을 요구하지만, 내 일이 되면 '착한 척 하는 위선'은 힙하지 못한 꼰대스러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 태도가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얻었으니, 토르가 토르의 망치를 얻은 셈이다. (볼테르가 쟈디그의 인품을 서술하는 몇몇 대목은 황당해서 웃기는 지점들이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나 역시 지금의 능력주의적 윤리관에 찌든 탓일 것이다.)
각종 사회 갈등의 전선을 가르는 정체성을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라클라우, 무페에 빠르면 정체성 역시 헤게모니적 접합의 산물이다. 그 접합의 기본 단위는 '요구'다. (중략)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각기 관철되지 못한 요구들이 우연한 기회에 서로 마주치면서 그것들 사이에 등가적 관계가 만들어진다. 등가적 관계란 '네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공감과 동의의 주고받음이다. 이렇게 연대감이 형성되면 '우리'와 '그들'의 적대 전선이 만들어진다. 정치적 행위자로서 인민은 이렇게 '우리'로 형성된다. - 김내훈(2022), p.87.
라클라우의 말을 빌려와 쓰고 있긴 하지만, 김내훈이 지적하듯이 정치란 근본적으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요구가 충돌하는 과정이다. 내가 일리치의 <젠더>를 읽고 내내 불편했던 것은 어째서 '남성'과 '여성'을 현대 정치에서 등장한 새로운 주체들로 보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젠더는 이분되어야 '역사적'으로 온당한 것이지만, 이렇게 이분된 주체들 사이에서 갈등에 의한 정치 행위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깔고 서술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이것은 성서 이전으로 퇴행하는 도덕 관념이다. 성서의 윤리관은 갈등 없는 공동체를 지향하기보다는 갈등에 의한 복잡한 정치적 행위들이 활발히 일어나기를 지향했다. 중세 기독교 정치가 예수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퇴행적이었기는 하지만, 성서에서 어떤 분기점이 생긴 것은 틀림없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마라. 화평이 아니라 전쟁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아들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싸우게 하려 함이니, 원수는 집안사람들이니라. ([마태복음], 10:34~36)"
희생 제의라는 보호막이 없는 세계에서 모방 경쟁의 강도는 줄어드는 대신 가장 가까운 관계에까지 비집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중략)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현대의 심리학이라 부르는 것의 진정한 기원을 알 수 있다. - 르네 지라르(2004), p.200.
일리치는 이분법을 옹호하고 그 경계를 넘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문화를 역사에서 찾고 있는데, 그런 민중 의식이 과연 현대인이 추구해야 할 집단 문화의 미래 형태냐 하는 점에서 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것은 르네 지라르가 지적하듯이 성서 이전의 윤리관에 의거한 신화적 카타르시스이다. 모방과 전복을 통한 해학을 발생시키거나 전이된 폭력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발생시켜 집단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 말이다.
나는 모지민이란 드래그 퀸 아티스트의 이미지들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감성이 매우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현대적이라 함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이분법에 의해 구분되어 있거나, 그 구분에 의해 반전되는 식으로 전복되는 '전근대적' 해학과는 다른 감성이라는 뜻이다. 경계가 흐릿하고 매우 부드럽게 융화되어 있다.
동물의 성과 사회적 젠더 사이의 구별보다 더 중요한 구별이 있다. 젠더 경계를 넘는 것과 그 경계 자체가 없는 것 사이의 구별이다. 젠더 경계의 소멸은 인류학적으로는 산업화된 문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젠더 규칙을 어기는 것과는 신중히 구별해야 한다. - 이반 일리치(2020), p.144.
희소성의 시대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가정 위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 인간이란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소유하는 존재이며, 물질적 생존의 측면에서 젠더 없는 존재라는 가정이 그것이다. 즉 인간이란 탐욕스런 경제적 중성(neutrum oeconomicum)이라는 가정이다. 이런 가정들이 결혼에서 학교에 이르는 제도들로 구현됨으로써 역사의 주체마저 바꿔놓았다. - 이반 일리치(2020). p.187.
하지만 나는 그 전략을 제시할 수 없다. 나는 어떤 치료가 가능한지 고려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중략) 수도사와 시인의 죽음을 관조함으로써 현재의 절절한 살아있음에 감사하듯이, 우리도 젠더 상실의 이 슬픈 현실을 응시해야 한다. 우리가 경제적 중성이라는 이중의 게토 - 즉 젠더의 보호막이 사라진 상황에서 성차별의 피해까지 보고 있는 상태 - 에 갇혀 있음을 엄중하고도 냉정한 시선으로 받아들이고 경제적 성이 제공하는 안락함을 거부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 한, 현대적 삶의 기술은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 이반 일리치(2020), p.188.
'젠더의 보호막'이라는 것을 나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과문한 탓인가? 일리치의 논리 전개를 읽고 있으면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엿보인다. 물론 이반 일리치는 미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회경제적 현상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미학적 감각과 사회적 차별의 감각이 완전히 분리된 것일까? 일리치 자신도 문화적 현상을 계급 인식으로 환원하고 있지 않나?
<젠더>는 반자본주의적인 측면, 에코페미니즘과 맞닿는 측면에서는 수긍이 가는 저서였지만, 뒤가 좀 찝찝하고 구린 책이었다. 버틀러나 해러웨이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리치의 주장도 이상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버틀러나 해러웨이는 우리가 상상한 적 없는 미래로 가는 '급진성'이 있었는데, 일리치는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듯이 보인다. 과격하다고 진보적인 건 아니지 않나?
급진이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함부로 쓰이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그저 마케팅 용어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르네 지라르의 '사탄'이 모방적 경쟁을 부추기는 존재라면,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극단과 급진이 서로 닮아가는 듯이 보이니 말이다. 그리고 남성성과 여성성도 서로를 닮아가는 중이지. 그게 뭐 어때서?
이상이 명절 전에 읽은 사상서 세 권을 관통해 가던 나의 생각이었다. 깔끔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지만, 유용할 듯하여 한 편의 글로 남겨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