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의 배신>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미국 가전의 발명과 보급이 가사노동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어 나갔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전기의 보급부터 발명, 광고, 저임금 여성 노동이 하녀에서 공장으로 옮겨가는 과정까지 총망라하여 20세기 이후의 미국 ‘가사노동’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가내하녀들이 공장노동자로 옮겨가는 이야기는 우리네 1970년대 풍경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일에는 단순히 임금(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하녀나 식모들이 공장으로 옮겨 간 이유에도 그런 것들이 존재했다. 덜 벌고, 주거비와 식비 등 생활비를 더 쓰고, 먼지를 마시며 장시간 일하고, 다칠 위험이 큰 일을 하더라도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한 사람의 노동자로 대접 받으며 일하고 싶은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사생활도 없고, 24시간 대기조로 쪽방에 머무르며, 동네에 나가면 고용주뿐 아니라 온 동네가 ‘식모’라고 부르는 존재로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의 표지 이미지는 Bing Image Creator로 만든 것인데, 프롬프트에 ‘하녀(maid)’라는 키워드를 넣어서 만든 것이다. 하녀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저런 옷차림(유니폼)은 19세기에 중간계급 여성들이 하녀들과 자신을 구분 짓기 위해 강요한 유니폼이라고 한다. 하녀 옷차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하얀 앞치마, 하얀 머릿수건은 후에 가전이 보급되면서 모든 주부들의 상징으로 전용된다. 가전의 초창기에는 가전을 ‘전기하인’이라고 광고했다고 하는데, 가내하인을 전기하인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설득하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과대광고에 불과했다. 노동집약적이고 시간 절약적인 가전이 보급되고 확산될 수록 주부들의 가사노동 시간이 증가하는데, 이것을 ‘코완의 패러독스’라고 한다.
코완은 1950년대 기준으로 평균적인 미국 주부가 혼자서 집안에서 해치우는 노동의 양이 1850년에 3명~4명의 가내하인의 도움을 받고 해치우는 일의 양과 같다고 보았다. 미국의 주부들은 가전제품의 도움을 받아서 가까스로 이 일들을 해결해 왔다는 것이다.
코완의 패러독스는 여전히 유효하다.
가사에 대한 노력이 줄어든 대신 일의 양이 증가했고(빨래는 하루에 두 번 하는 것 아닙니까? 흰색과 검은색.),
가사노동 설비를 집에 들이면 그 설비로 만들어내는 인공물을 사서 쓰는 게 아니라 가정에서 만들도록 유도되었으며(제빵기를 샀으니 빵을 구워라),
여성 노동력에 대해서 시장의 수요는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그림자 노동 영역에 머무르며 노동시간을 계속 증가시켰다(닦고 또 닦자, 어차피 집에 있는 몸).
코완의 패러독스가 생긴 이유, 즉 ‘기술’이 약속한 것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과학과 의학의 발달 때문이었다. 근대 이후에 서양에서는 아동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아이를 잘 키워내는 것을 국민국가 어머니의 의무로 만들었다. ‘잘 키워낸다’는 것의 의미도 변하였다. 위생학, 질병세균학, 영양학적인 면에서 새로 발견된 과학지식이 맞게 더 청결하고, 더 안전하게, 더 건강하게 아동을 관리하고 가정환경을 꾸려야 했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누런 코를 줄줄 흘리며 오른팔 점퍼 소매가 콧물로 반들반들해진 아이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의 초등학교에는 그런 아이들을 발견하면 아동학대 의심 신고를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가사노동에 대한 기대치가 상승해온 결과물이다.
기대치의 상승과 기대에 부응하는 가사노동 시간의 상승이 멈추고 하락세로 돌아선 것은 가사분업 덕분이었다. 60년대 이후로 제2차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남성들의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이 바뀐 덕분이었다. 남성들의 인식 변화로 어머니 혹은 아내에게 몰빵 했던 일을 ‘부부’가 공평하게 나누기 시작하자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족이 아니라 부부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전에는 아동의 가사노동이 당연했으나, 근대 이후로 아동노동은 범죄가 되었다.)
‘기술’은 우리 삶의 겉모습만 바꿀 뿐, 본질과 구조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증명하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가정 안에서 무슨 기계가 누구에게 어떤 노동시간을 줄여주었는가 구체적으로 연구한 논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통계국이 4555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이 연구에 의하면 식기세척기, 전자레인지, 건조기는 여성들의 가사노동시간을 줄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풀 깎는 기계의 보유는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을 뚜렷이 증가시켰다. 게다가 초저온 냉동고나 식기세척기는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을 아주 약간 줄여주었다.
그러니까 남자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가전을 던져주면 남자는 그 기계를 써서 일을 더 많이 하고(잔디깎이도 있는데 풀 좀 깎지?), 마찬가지로 여자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분야에 기계를 주면 여자들도 그 일을 더 많이 한다(세탁기도 있는데 이불 좀 자주 빨지?). 그러나 남자에게 여자들 일을 하는 기계를 주면 일을 더 적게 한다. 어차피 여자 대신에 하던 일이었으니 기계를 써서 대충 해치우는 것이다. 애초에 그 일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낮기 때문이다(식세기에 그릇을 넣은 게 어디냐. 꺼내는 것은… 그냥 쓸 때 꺼내자. 거기 둬.).
오스트레일리아의 연구의 저자들은 기계와 기술이 젠더 영역 허물기는커녕 젠더 경계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저장된 성별 고정관념은 기계나 산업화로 허물어지는 게 아니라 더 강화되는 것이다.
기술 자체는 미추와 선악, 고정관념, 편견과 같은 비물질적 문화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기술이 손댈 수 있는 것은 물질 문화에 국한된다.
나는 저 세탁기의 역설을 역전시킨 사례, 풀 깎는 기계를 확장 시킨 사례를 하나 알고 있다. 농촌의 소농과 대농들은 노동의 젠더 구역을 다르게 설정한다. 거의 기계화가 되어 있지 않은 소농들은 남녀 구분 없이 밭일을 한다. 내가 아는 소농의 여인들은 만삭에도 고춧대를 붙들고 졸면서 밭일을 했다. 그러나 대농은 다르다. 콤바인, 트랙터, 농업 자동화 기계들이 줄줄이 도입되어 있는 곳에서 여성들은 큰 기계를 만지는 일에서 배제된다. 대체로 그들은 지붕 아래서 일했다. 새참을 만들거나, 선별 작업을 하고, 라벨링을 했다.
일리치의 <젠더>에서 환금성 작물이 젠더 영역을 파괴했다는 대목을 읽다가 의아했던 것도 이 탓이었다. 내가 아는 사례들에 비추어 보면 젠더 영역은 파괴되지 않고 잠수 중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상황이 변하면 다시 나타나곤 했다. 젠더 영역은 그렇게 쉽게 파괴되는 것이 아니었다.
일리치가 오해하는 것은 물질 문화가 비물질 문화에 바로 타격을 주리라 여겼다는 점이다. 그럴 리가 있나. 이놈의 사회가 엉망이라고 외치며 고난과 수난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 덕분에 조금씩 바뀐 것이다. 말하자면 환금성 작물 때문에 여성들이 밭에 투입된 것이 젠더 영역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안 파괴됨, 잠시 잠수했음.), 여성들이 ‘이렇게 전천후로 부려먹을 거면 이혼하겠다’고 들고 일어난 것이 젠더 영역을 무너뜨린 것이다.(그게 사실이라면 1800년대 초반의 ‘이혼 가능한’ 미국 사회가 부러울 따름이다. 그때 우리 어머니들을 떠올려 보라.)
SF 소설들이 기술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사회 속에서 섬뜩한 무엇인가를 자꾸만 찾아내는 이유는 그런 점에서 사회운동과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로만 해결될 줄 알았지? 그럴 리가 있느냐.’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다루고 있으니까.
그와 반대로 농촌에서는 젠더든 노소든 사회적 역할 모델이 거의 변화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부당한 것에 항거하는 경향이 더 적기 때문이다. 농촌의 젊은이와 여성들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속의 사람들처럼 그 사회를 외면하고 떠나갔으며, 남은 자들이 유지한 사회는 유동성이 줄고 경직성만 늘어갔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나>에 등장하는 농촌 여성들은 도시의 여성들보다 훨씬 열악한 처지에 있었다. 적어도 도시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경제 영역과 비경제 영역으로 나눠서 ‘내가 일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낄 수나 있었지, 농촌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다. (‘30년은 더딘 농촌의 시간’ 챕터 참조. p.208~217.)
농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 살든 현대 정치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매김하지 않았던 여인들의 삶은 대체로 비슷했다.(졸고 ‘젠더에 대한 삐딱한 감상’ 참조)
다음 사례를 보자.
p.252
독서실 운영 수익은 어떻게 관리하셨어요.
수익은 다 시아버지한테로 갔어요. 저는 일 자체가 재밌어서 그런 건 잘 몰랐어요. (월급을 전혀 안 받으셨어요?) 네.
p.253
남편분은 그냥 명함만 필요하셨던 건가요.
명함으로 얘기하면 저희는 딱 갈리는 거죠. 저는 명함만 없이 일은 많이 했고, 그 사람은 정말 명함이 많았어요. 많이 찍고 다녔어요. 무슨 무슨 산악회, 연합회 회장 등….
p.251
시아버지가 성차별이 심한 분이셨군요.
(중략-시아버지가 손녀딸 돌상을 딸이라는 이유로 엎어버린 사건)
참자. 내가 우겨서 시끄러워진다면 참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요청에도 보행기나 유모차를 사주지 않는다. 남들이 다 갖고 있는 물건이지만 안 사주니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해 뒤처지지 않게 키우려 애썼다고 한다. 무료 교육, 행사 같은 곳에 애를 업고 다니며 키우셨다.
<세탁기의 배신>을 보면 가전의 보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중상류층의 욕망인 “버젓한 삶”이었다. 남들처럼 가전을 갖추고 남들만큼 외식을 하면서 살기 위해 여성들의 취업은 증가했다. 남편의 월급만으로 버젓한 삶을 만들 수 없으면 기꺼이 집 밖의 경제 활동을 해서 돈을 벌어 왔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어머니들의 성격은 비슷한가 보다.)
위 사례의 여성은 “참자.”로 '버젓한 삶'을 향한 주도권을 시아버지(가부장)에게 넘겨왔다. 사실 저 분은 당시로서는 고학력 여성이었다. 바보라서 저렇게 행동한 게 아니었다. 여자가 앞에 나서는 일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장벽을 만들어내기 일쑤였다. 앞에 나서서 강풍을 맞으며 전진해야 하느니 뒤에서 실무를 맡는 편이 나았다. 남자들이 앞에 나설 경우 바람의 세기가 확연히 줄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햇님이 빵긋 웃기도 했다. 명함을 찍어 다니며 사교를 열심히 했던 위 사례의 남편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렇게 사회와 가족이 요구한 참을성을 잘 구현해냈던 저분은 이혼을 당했다. 그것도 빈손으로. 정말이지 너무 흔해서 지겨운 기분마저 드는 스토리이다.
현대 사회에서 젠더 갈등이 불거지는 이유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 노동 경제 구조 때문이 아니라, 침범했는데 침범하지 않은 척하고 살려고 버티고 있는 저 시아버지와 같은 의지 때문이다. 아내와 며느리를 실컷 경제 활동 노동력으로 부려 먹고 화폐는 구경도 안 시켜줬던 가부장들이 저 시대에는 널려 있었다. 요즘에 그렇게 했다가는 JTBC 사건반장 같은 곳에 나오지 않을까?(아, 또 모르겠다. 시대착오적으로 온순한 여성들이 여전히 존재할지도….)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읽으면 여성 노동이 ‘단절’과 ‘보조’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육아나 가족 간병 같은 이유로 언제든 중단될 수 있으며, 명함을 찍는 대표자 역할은 할 수 없었다. 평생 쉬지 않고 일했는데, 육아와 가사노동을 제외하고도 해온 일을 꼽으라면 서너 개는 너끈히 꼽는데(요리사, 방문교사, 농부, 광부, 청소부, 사회봉사자, 요양보호사 등등), 명함도 없고, 사회는 그녀들을 ‘비경제 인구’였다고 한다.
위 문장들은 과거형이다. 이거 맞는 문장인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읽기 직전에 <월급사실주의 2023: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를 읽었다. <우리가 명함이…>를 읽고 나니 <월급사실주의>를 읽을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쉬움이 생겼다. 책이 전반적으로 젊은 노동자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반적으로 다양한 직업군을 다루고 있고 성별 안배는 균형있는데, 노년의 여성 노동자가 등장한 소설은 김의경의 <순간접착제> 뿐이었다. 중심인물이 아니라 주변인물로 나온 것은 그렇게라도 나온 게 어디냐 싶지만, 그 재현 방법에 대해서는 흠... 할 말이 많은데 쉽게 말을 못 하겠다.
오혜진은 평론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에서 장강명의 젊은 페르소나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월급사실주의’ 기획과 작가 선정을 장강명이 해서 그런가 하는 괜한 의심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명함이…>처럼 주변에 너무 흔하게 있어서 오히려 인식하지 못하는 진짜 사람의 모습을 다루는 글들이(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월급사실주의 기획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계속 이어진다면 특이한 직업(소재)를 찾는 경향이나 주제 자체가 되어버리는 서정적 감수성 따위를 넘어서는 '진짜(Realism) 소설다운' 무엇이 나오지 않을까? (한국 소설가들은 할 수 있을 거야. 훌륭하신 분들이 많잖아.)
그런 의미에서 <월급사실주의2023>에 실린 이서수의 ‘광합성 런치’와 정진영의 ‘숨바꼭질’은 정말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몰입하여 읽은 리얼리즘 단편들이었다. 소설이라는 예술의 영역에서 소재와 주제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말하느냐’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은 소설들이었다.
첨부) 마지막으로 식당경영인, 의류제작업, 가족간병인, 가사노동자, 육아 등등의 역할을 이중삼중으로 수행하며 살아오신 어머님의 당당한 뒷모습을 올려 본다. 이 이미지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눈물 나면서 가슴이 벅찬, 슬프면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는 실제로 저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