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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hatehate Mar 16. 2023

겸허의 마음으로

<새 마음으로> 이슬아

*22년에 쓴 글


소개할 때 굳이 이런 저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지 않은 책이 있는데, <새 마음으로>가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저자 이슬아가 이웃 어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응급실 청소 노동자 이순덕 님, 농업인 윤인숙 님, 아파트 청소 노동자 이존자, 장병찬 님, 인쇄소 기장 김경연 님, 인쇄소 경리 김혜옥 님, 수선집 사장 이영애 님까지, 총 여섯 분의 생이 요약되고 요약되어 이 책에 담겨있다.

저자 이슬아는 매일 수필 한 편을 메일로 발송하는 '일간 이슬아'의 연재 노동자이자 헤엄 출판사의 대표인 작가 겸 출판인이다. 지금이야 많은 업체와 개인이 메일링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수필 메일링 서비스를 (내가 알기로는) 처음 시작한 사람이 바로 이슬아다. 어떤 면에서는 그를 개척자라고 부르고 싶기도 하다.


이슬아는 자신의 글에 주변 친구와 가족들을 많이 출연시키는데, 그들을 자신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출연시키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그 자체로 작품 속에 세운다. 예를 들면 이슬아의 어머니인 장복희 님은(독자가 작가 어머니의 이름을 외우고 있다는 것부터가 새롭지 않은가) 어머니로 언급되기보다 '복희씨'로 늘 불리고 쓰인다.

사람을 사귀는 데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나이로 만들어지는 무언의 벽은 있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92년생 이슬아는 4,50년대생 어르신들에게 '어르신을 대하는 젊은이'로서 보다는, 그저 한 인격체를 대하는 한 인격체로서 다가간다. 그래서 동갑내기 친구의 어머니도 이슬아에게는 친구가 된다.

이번 책도 그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생겨난 궁금증으로부터 읽게 되었다. '이번에 그는 어떤 친구를 사귀게 되었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친구라는 단어로는 표현이 부족한, 여섯 개의 작은 우주가 그의 품에 안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존재를 알아간다는 것은 이렇게도 무궁하고 벅찬 일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내 품에 안고서 생각했다.


책에 나온 여섯 분의 이야기를 다 다룰 수는 없으니 몇 분만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첫 번째, 이순덕 님이다. 순덕 님은 이대목동병원 응급실에서 1993년부터 2020년까지 27년간 청소를 해오신 응급실 미화원이다. 병원의 다른 곳도 아니고 응급실이라니, 생이 연결되고 끊어지는 치열한 그 곳에서 27년간 쉼 없이 일해온 순덕 님은 젊을 적 들어와 어느새 예순일곱이 되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응급실과 응급실 안 화장실 청소까지 혼자 도맡아 하는 그는 아무리 더럽고 메스꺼운 냄새로 가득해도 병원이기에, 건성건성 일할 수 없다고 한다. 피와 온갖 오물에는 익숙해질지언정 죽음 앞에서는 매번 깜짝깜짝 놀라는 그는, 언제나 혼자 사는 노인들을 생각한다. 일하는 와중에도 매주 독거노인 집에 찾아가 목욕시키고 밥 안치고 청소해주는 봉사를 한 지도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슬아: 세상에, 어떻게 그 힘이 나세요?

이순덕: 왜 그러느냐면요. 내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남의 손에서 커서 그래요. 평생 외롭고 아주 그냥 고달펐잖아요. 사랑도 못 받고요. 어려서부터 생각했어요. 나는 성장해서 돈을 벌면 꼭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도와야지 하고요. (…) 내 아들도 젊어서 죽고 남편은 병들어 죽었거든요. 사람들이 저보고 왜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냐고 그래요.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들한테 그렇게 마음이 쓰이나봐요. 나처럼 힘들 것을 아니까요.(p.40)"


저자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썼다. "순덕 님은 "사는 게 너무 고달팠어요"라고 말한 뒤 "그래서 더 힘든 사람을 생각했어요"라고 덧붙였다. 나는 이 두 문장이 나란히 이어지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p.48)" 사는 게 고달파서 나보다 더 힘든 이에게로 눈을 돌리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 시선을, 그 손길을 어쩌면 평생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할 이웃 어른은 아파트 청소 노동자 이존자, 장병찬 님이다. 이 두 분은 저자의 할머니, 할아버지로 할머니는 1948년생, 할아버지는 1947년생이다. 두 분을 인터뷰하겠다고 찾아간 집에는 손녀를 기다리는 마음들이 늘 그렇듯 꽉 찬 상이 준비되어 있었고, 존자 님은 밥을 먹자마자 갑자기 외쳤다. "근디 뭔 할무니 할아부지를 인터뷰한다고 그러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여~!(p.118)" 자신들을 멍청이라고 표현하는 그 마음에는 자식들을 위해 애쓰는 노력 같은 건 조명 받지 않아도 상관 없는, 아무것도 아닌 참으로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깃들어 있음을 안다. 그래서 저자는 그저 환히 웃으며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흙에 묻힌 보석 캐내듯 살며시 조금씩 들어올린다.


"이존자: (…) 그래서 고순남 할머니(저자의 외증조모)가 고생을 많이 하셨지. 고생은 우리 애들도 많이 했어. 복희랑 동생들이 자주 굶었지. 먹을 게 없응께.

장병찬: 그러다 복희 중학생 때쯤 우리가 다 서울로 왔어. 집도 절도 없이 도망쳐온 거여. 서울 와서 맨 처음에 한 일이 쓰레빠 공장 나간 거였어. 그때 월급이 7,000원이었어.

(…)

장병찬: 근데 한 달 7,000원으로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건축 노가다 쪽으로 일을 옮겼어. 우리 둘이 노가다 일을 몇 년이나 했지.

(…)

장병찬: 모래하고 시멘트 섞은 게 한 포대에 40킬로 정도 되거든? 할머니가 당시 삼십 대 후반이셨는데 그걸 두 포대씩 지고 계단을 오르내리셨어.

이슬아: 세상에, 80킬로를 지고 다니셨다고요?

이존자: 그랬지. 내가 정신력이 강했어. 그렇게 독하게 벌었어도 복희를 대학에 못 보낸겨. 노가다 일 다음으로는 여관 청소일도 오래 했지.(p.132)"


쓰레빠 공장과 건축 노가다, 존자 님은 여관 청소, 병찬 님은 상가 경비원 생활 후 도장 가게 운영. 오랜 세월 여러 노동을 경험하다가 2008년에 시작해서 현재(2020년 기준)까지 아파트 청소 노동자로 근무하는 두 사람은 아직도 자식을 더 공부시키지 못했던 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 뿐일까. 복희 씨가 결혼하고 난 뒤 존자 님은 위암으로, 병찬 님도 크게 아파 3년 6개월 동안 병원에서 지낸 일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이상햐. 미안한 일들도 한스러운 일들도 어제 일처럼 기억나는데, 그런데도 나한테 삶이라는 게 참 풍족한 것 같어.(p.150)"


이 글에 적은 이야기는 그들이 지나온 세월의 극히 일부이고 책에 적힌 내용 또한 일부일 것이기에 그들의 인생을 채 헤아릴 수 없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넓고 깊은 한 사람의 바다 같은 인생이 펼쳐진다.

우리 이웃 어른들의 치열하고 생동했던 삶을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이미 어른일지라도 '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이순덕 님의 말처럼, 감정이 올라와도 나 자신이 상하지 않도록 새 마음으로, 자꾸자꾸 새 마음으로 하는 거라는 윤인숙 님의 말처럼, 새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매번 실천해도 매번 처음같은 겸허의 일일 것이라고. 그리고 소망한다. '매일을 새 마음으로.' 이 다짐만으로 충분할 삶을, 곁에 선 이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는 애정만으로 충분할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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