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hatehate Feb 20. 2023

하늘 아래 같은 게으름은 없다

<미루기의 천재들> 앤드루 산텔라

*22년에 쓴 기고글


고백할 때가 되었다. 나는 매월 이 칼럼과 싸워왔다. 월초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마감이라는 의무와 미루기라는 유혹 간의 싸움. 무엇이 이기든 나의 승리이고, 무엇이 지든 나의 패배인 이 싸움의 역사는 작년 8월,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싸움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에너지가 소모되기 마련이므로 나는 작년 8월부터 주기적으로 극심한 체력 고갈에 시달리곤 했다(물론 원고를 보내고 나면 에너지는 알아서 고속충전 되었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란다. 칼럼 연재를 후회한다는 말이 아니다. ‘칼럼 연재를 후회한다’와 ‘원고 작성을 미룬다’는 같은 선상에서 성립되는 명제가 아니다. 10개월가량 부족하고 짧게나마 글을 써오면서 느낀 바가 많고 감사한 바는 더 많았기에 후회한 적은 없다. 그저 ‘미루기’라는 전 인류적인 허들은 새로운 과업의 시작과 동시에 그에 맞게 새로이 탄생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늘 아래 같은 게으름은 없다.


만약 위 두 문단을 읽고 ‘아 자주 미루는 사람은 과장도 밥 먹듯 하는구나’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단언컨대 그 사람은 나의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 이제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글을 읽으며 조금이라도 고개를 끄덕였다면, 이 책을 자격이 있다. (지금 이 주장은 과장이 맞다.) 

책 소개에 앞서 유난히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지금껏 ‘해야 할 일’ 근처에 있는 업무에만 집중해왔던, 그렇게 필사적으로 해야 할 일을 외면해왔던 행동들은 그 나름대로 이유와 사연이 있었건만 언제나 깔끔하게 설명하기(혹은 변명하기) 힘들었던 탓에 나를 무책임한 게으름뱅이로 비치도록 만들곤 했는데, 마침내 나를 대신하여 설명해줄(혹은 변명해줄) 책을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앤드루 산텔라의 <미루기의 천재들>이다.


이 책은 인간의 오래된 숙제인 ‘미루기’의 역사와 기원을 탐구한 책으로 저자인 앤드루 산텔라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역사책을 70여 권 펴낸 작가이자 <지큐>, <뉴욕타임스 북리뷰> 등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뉴욕 브루클린에 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중요한 일을 미루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책날개에 소개되고 있다. 소개 글에서 추측할 수 있듯 이 책은 작가의 자기합리화를 위해 탄생하였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미루기와 장기연애 중인 작가로서는 이 책이 출간이라는 ‘끝’을 보았으므로 자신의 기질에 반(反)하는 결과물이기에 모순적이기도 한데, 책이 다루는 범위를 보면 그 성실함에 혀를 차게 되므로 모순적인 것을 넘어서 모순덩어리 그 자체이다.


미루기의 기원은 마치 종의 기원처럼 찰스 다윈과 레오나르도 다빈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두 천재 학자들은 미루기에 있어서도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다. 다윈은 1838년 여름 노트에 “모든 종은 변화한다.”라는 세계를 뒤흔들 문장을 적어놓은 뒤 20년 동안 <종의 기원>을 출간하지 않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의뢰받은 그림을 7개월 안에 완성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그림이 의뢰한 장소에 걸린 때는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였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읽으면 수백 년을 거스른 친밀감이 괜스레 생기고는 한다. (아, 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구나…!) 하지만 그들은 생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금세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진짜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래도 위안이 되는 확실한 한 가지는, 옛날 사람이나 지금 우리들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이 귀찮아하고, 게으르고,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며 살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심리학과 행동 경제학, 예술과 문학을 아우르며 ‘미루기’의 원천을 탐구하는데 유독 흥미로웠던 분야는 심리학이었다. 저자가 집필을 위해 찾아갔던 미루기 전문가 중 한 사람인 시카고 드폴 대학 교수 페라리는 자기 불구화 전략으로서의 미루기를 처음으로 연구한 사람이다. 자기 불구화란 ‘실패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행위’를 말하는데, 자기 불구화 전략으로서 일을 미루는 사람은 일이 자기 능력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룬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는 말한다. 미루기는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만성적으로 일을 미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능한 인간으로 여겨지기보다 노력을 안하는 인간으로 여겨지길 바라지요.”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다. 매월 칼럼 원고를 최대한 미루고 미루는 나의 행위도 이러한 자기 불구화 전략이었던 것 같았다. 미루는 행동이 실패로부터 나를 보호해주고 있으며, ‘미루는 행동이 실패의 원인인 동시에 실패에 대한 변명’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고백한다. “내가 할 일을 미루는 것은 태반이 불안 때문이다. 잡지에 글을 싣기로 해놓고 내 능력이 부족할까봐 걱정하며 작업을 미룬다. (…) 의사가 내 몸에서 상상조차 하기 싫은 문제를 찾아낼까봐 걱정하며 몇 년째 검진을 미룬다. 할 일도 너무 많고, 걱정할 이유도 너무 많고, 리스트도 너무 많다.(p.108)”


이 책의 원제는 ‘Soon’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어버전보다 더 절묘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곧, 그러나 지금은 아닌... (할 수만 있다면 ‘Soon’ 옆에 부제처럼 ’Not Now’를 붙이고 싶다.) 그리고 미루기에 있어서 ‘지금은 아닌’ 것과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성질은 바로 ‘머무르기’이다. 저자는 이 ‘머무르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자신이 형편없는 글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쭉 빠진다. 작가는 실패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오래도록 글을 붙잡고 마무리하지 않는 한 굉장한 작품이 나올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가능하다.(p.176)”

사실 언제까지고 머무르기만 할 수는 없다는 걸 저자도,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그 누구도 무한한 가능성을 머금은 채, 그러나 실현될 리 없는 과정 속에서만 평생 있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미루기에도 끝은 있고 우리도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저 그날이 오늘은 아니길 바랄 뿐. 급할 것은 없다.


나에겐 둘 다 필요하다. 해야 하는 일에서 도망가는 것도, 흠잡을 데 없는 착실함도. 후회도, 실천도. 

나는 인간이다. 나의 결점은 나의 가장 훌륭한 점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p.227

매거진의 이전글 환각의 문을 열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