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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hatehate Feb 15. 2023

환각의 문을 열어라

<상아의 문으로> 구병모

*22년에 쓴 글


며칠 전 소위 대박 꿈 중 하나인 똥 꿈을 꾸었다. 남의 똥 보듯 쳐다보는 꿈도 아니고, 무려 직접 만지는 꿈이었다. 온갖 샤머니즘과 미신에 관심 없는 본인이지만 이런 꿈은 보통 꿈이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무실에 출근하여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동료들에게 마구 자랑하니 이건 복권을 사야 한다며 몇몇 동료들이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했다. 결국 생애 첫 복권을 사고 나서야 알았다. 복권을 살 거라면 아무에게도 꿈 얘기를 해선 안 되었다는 걸.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기에 복권은 당연히 꽝이었고, 동료들은 왜 본인들에게 얘기했냐며 나무랐다.(이제 와서?) 불로소득을 두려워하는 나이기에 다행이지, 인생 목표가 일확천금인 사람이었다면 한동안 우울해 마지않을 정도의 에피소드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우습다. 아무 과학적 근거 없는 꿈-재물의 관계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게. 큰 금액이 당첨된다면 과연 꿈의 힘이라 할 테고 꽝이라면 남에게 말을 해서 그렇다느니 똥의 크기가 문제라느니 사실 똥을 만지면 안 되고 바라보거나 밟았어야 했다느니 별의별 이유가 나올 테지. 우리는 유독 꿈에 진심이지 않은가. 좋은 꿈을 꾸면 그날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악몽을 꾸면 오늘은 왠지 온종일 몸 사리고 조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많은 이들이 꿈 해석을 받기 위해 이곳저곳 찾아다니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꿈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 꿈보다 우위에 있을 때 가능하다. 해석의 행위는 객체가 주체의 능력 안에 존재할 때 이루어지므로. 해석하고 연구하고 끝내 결론 짓게 되는 그 과정들은 우리가 꿈을 인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을 꿈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 이 순간이 꿈일 수도 있고 꿈이 아닐 수도 있다면?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실재하는 사람일 수도, 혹은 내 꿈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일 수도 있다면? 이 모든 의심에 나는 한 마디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꿈의 바이러스에 잠식된 불안의 세계를 그린 <상아의 문으로>는 이러한 의심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저자인 구병모 작가는 허를 찌르는 서스펜스와 날 선 긴장감을 지닌 작품을 선보여 왔으며 이번 작품에서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몰입감과 함께 꿈이라는 익숙한 주제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냈다. 현실과 비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문장들로 인해 이 책은 마치 끝이 없는 시작 같기도 하고, 시작한 적 없는 이야기의 결말 같기도 하다. 그는 우리 일상에서 일어날 법하면서 어딘가 환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소설을 많이 썼는데, 이번 작품도 우리의 ‘지금’에서 시작한다.

<상아의 문으로> 주인공 진여는 일반 직장인이다. 아니 직장인인 줄 알았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지나가며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고 인사를 한다. 그렇다. 진여는 선생님이다, 바로 체육 선생님. 야외 수업을 위해 밖으로 나가니 비가 온다. 비를 맞고 있자니 추워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건물에 문이 없다. 거짓말처럼 문이 없다. 갑자기 이곳이 어딘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학교였던가, 학교가 아니었던가. 그때 학생들이 언제 저만치 갔는지, 비는 애초에 오지도 않았던 건지 웃으며 모퉁이를 돌아선다. 학생들을 쫓아 모퉁이를 도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빗줄기도 없다. 이 상황들은 진여가 하루를 보내면서 겪는 ‘꿈 증상’ 중 하나다.

꿈 증상이란, 과한 노동과, 과한 노동을 보상받기 위한 욕망의 과소비로 인해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체내 아데노신 농도가 한계치에 달해 수면의 압박을 받지만, 그것을 정상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일상이 지속되면서 점차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환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진여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겪고 있을 만큼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지만 이런 혼란을 틈타 온갖 상품과 상업적 서비스가 개발될 뿐 그들의 일상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지속되고 만다.


실제로 치명률이 높은 전염병이 돌 때도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눈치를 보느니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하기를 선택하는 환경에서, 고작 꿈을 이유로 휴가를 낸다면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칠 뿐이며, (…) 어느 쪽이든 부작용은 작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 행동이나 불안 요소를 제때 보고하지 않고 자기 관리에 실패한 직원은 과연 다음번 재계약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p.77)”


진여는 꿈 증상에서 벗어나고자 수많은 치료를 시도해보지만 그럴수록 치료들에 대한 불신만 커질 뿐이다. 심지어 치료를 받는 중에서도 꿈 증상이 발현하여 현실이지만 현실일 리 없는 일련의 상황들 속에 놓이게 된다. 

하루 중 내가 진짜 살아낸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는 혼란 가운데서 진여를 안심시키는 것은 바로 ‘이름’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어제보다 10년은 더 나이를 먹은 듯싶고 어제가 있기는 있었는지 어제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희미하더라도 진여라는 이름만큼은 선명하다(p.89).”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중요한 개념인 이름. 진여는 자신의 이름 외에 한 명의 이름을 더 알고 있다. 증상이 시작된 뒤로 동료들의 이름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건만 그 사람의 이름만큼은 기억하고 있으므로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바로 꿈 증상 강의를 들으러 갔을 때 만난 ‘무기’. 무기는 피스 메이커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꿈 증상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진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지금껏 우리에게 꿈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내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결론 지어도 상관없는, 한순간에 휘발되어버리는 가벼운 해프닝 같은 것. 그러나 만약 현실이라고 믿었던 사건들이 꿈일지도 모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행동조차도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다면, 타자를 치는 사람이 ‘나’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면.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 삶은 의미를 잃고 만다. 무기는 의미 잃은 삶을 사는 진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누군지를 말할 수 있습니까?”

꿈에 잠식당한 세계란 마치 책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판타지 같지만, 어느 면에서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비춰지기도 한다. 매일 각성의 상태로 밤을 지새우며 물밀 듯 밀려드는 이미지와 영상에 눈과 마음을 쏟는다. 액정 속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가 다를 바 없는 듯하면서도 무심코 느껴지는 괴리감에 침잠한다. 경계 없는 <상아의 문으로>의 문장 속에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책을 덮은 이 손은 나의 손인지, 내가 지금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지 불현듯 의심에 휩싸인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작가가 뻗은 환각의 손을 덜컥 잡고야 마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상아의 문이 어느새 활짝 열린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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