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교육쟁이 Mar 01. 2020

야하고 폭력적인 성의 외주화

왜 성교육 책은 대부분 양육자를 대상으로 할까?     


시중 성교육 도서를 보면, 아동청소년/양육자를 대상으로 하는 도서가 다수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공교육에서 다루는 성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공교육 안에서 자세하고 실용적인 성을 다루기는 어렵다’라는 생각을 반증하는 것 같다. 자세하고 적나라한 성교육에 우려를 보이는 학교나, 여러 성교육 도서를 읽어도 여전히 성교육을 하려고 하면 입이 떨어지 않는 양육자나, 기저에 깔린 생각은 비슷하다.      


“성은 야하고 폭력적인 것이다.”     


그러니 학교에서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학교에서 ‘다루면 안 된다’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학교 성교육이 이렇게까지 엉망인데도 변화에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건, 이 생각에 기반한 건 아닐까? 야하고 폭력적인 것을 굳이 들쳐 낼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게 아닐까?

  

그런데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성교육이라고 쉬운 것도 아니다. 쉽지 않으니 계속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교육으로 만난 양육자는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했다. ‘성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냐, 가족의 노출과 스킨십이 불편한데 어떻게 해야 하냐, 자녀가 포르노를 보는 것 같고 자위를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개입해야 하냐’ 등등. 결국 누가/어디가 됐든 ‘성’에 대해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확하게는 ‘야하고 폭력적인 성’이 아닌 ‘성’을 다루는 게 어렵다 .   


그런데 시국이 시국이니, 성폭력예방차원에서라도 성교육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난 양육자들은(특히 여아를 둔 양육자들은)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성교육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문득, 이 또한 사회적 폭력을 개인이 짊어지는 양상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성은 정말로 야하고 폭력적인 것일까?     


성교육을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핵심 메시지가 있었다. 바로 성은 즐겁고 행복한 것이어야 한다는 명제였다. 성은 곧 우리의 정체성이며, 야하고 폭력적인 것만으로 단정지어 나의 행복추구 권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야하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은 성이 무엇인지 정확한 상을 그리기 어렵다. 성교육을 하는 나 또한 그렇다. 내 경험상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성과 관련된 기억은 모두 폭력적이고, 야한 것이었다. 엄마 몰래 포르노를 다운받아본 기억, 남자 선배에 의해 성희롱을 당한 기억, 다음날 월경이 나올 때까지 임신의 불안에 떨었던 기억, 늦은 밤길을 걷고 있는 내 앞에 바바리맨이 나타나 자위를 한 기억 등등.      


성이 야하고 폭력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일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경험으로 축척한 보편적인 데이터다. 그러다보니, 나 또한 성교육을 하면서 내내 모순지점에 부딪쳤다.      


성은 즐겁고 행복한 것이어야 한다는 당위와, 내 경험상 별로 그런 기억이 없었다는 체념.     


체념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성폭력예방교육을 통해 폭력으로서의 성을 강조하고, 성별을 통해 잠재적 가해자와 피해자화 하는데 가담하는 것이었다. 교육 시작 전에는 ‘성은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라고 말해놓고, 건낸 메시지는 ‘폭력에 예민하게 반응하세요 여러분!’ 이라니, 이렇게 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교육 내내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을 지우질 못했다. 성을 폭력과 안전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고(사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그로 인해 분리적인 갈등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구성된 것이며 권력의 효과는 아닐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왜 내 경험 바깥에 이상적인 모델이 존재할거라고 생각했는지 반문하기 시작했다. 폭력 바깥에 비폭력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은 결코 우리 안의 폭력을 바꾸지 못할 거라는 생각. 경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경험한 것으로부터 변화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      


결국 폭력예방교육은 폭력을 비판적으로 다룸으로써 즐겁고 행복한 성이 무엇인지 재구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평등과 평화와 행복은 우리 안의 불평등과 폭력 차별을 사유하고 비판하고 바꾸려는 노력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교육을 하면서 깨달아갔다. 성은 즐겁고 행복한 것이어야 한다는 분리적인 강박으로 인해 힘들게 돌아온 셈이다.      


그렇다면 다시, 폭력을 다루는 성교육이 결국 폭력으로서의 성을 강조하고 즐겁고 행복한 성의 가능성을 탈각시키게 되는 거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야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성이 정말로 없는 게 아니다. 애인과의 다정한 스킨십, 서로 배려하고 배려 받았던 대화, 안전한 성관계를 위한 준비, 출산과 육아 보살핌으로 인해 성장한 나 자신 등등. 어느 순간 성은 분명 즐겁고 행복한 것이기도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즐겁고 행복한 성은 야하고 폭력적인 성과 아예 다른 걸까? 어쩌면 이는 함께 존재하는 게 아닐까? 정확하게는 어느 상황, 어떤 사람, 어느 관계냐에 따라 내제한 여러 특성들 중 무언가가 도드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수많은 환경과 감정과 관계에 맞물려 무엇이라기 특징짓기 어려운 성이 야하고 폭력적인 것으로만 얘기되는 건, 그 또한 권력으로 인해 구성된 것은 아닐까?     


야하고 폭력적인 성이 유독 문제가 되는 집단은 ‘여성’과 ‘청소년’이다. 성과 관련해 주체가 되어 이야기 할 수 없는 집단이기도 하다. 성에 대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 또한 행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야하고 폭력적인 성에서 보다 자유로운 이는 누굴까? 결국, 성의 주체가 되는 이는 누굴까?     


야하고 위험하지 않은 성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성애 결혼가족 내 출산과 육아, 보살핌을 이야기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욕, 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 성에 있어 능동적인 주체를 남성으로 상정한 효과는 여성과 청소년이 이성애 결혼 가족 내에서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성은 원래 야하고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며 권력의 효과다.      


나는 성교육을 통해 이 말을 건내고 싶었다.     



      

왜 성교육이 페미니즘 교육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여성학을 전공했다. 어떤 사람이 질문했다.     

 

“그런데 왜 성교육을 하세요?”     


성교육은 섹스를 다루고 페미니즘 교육은 젠더를 다룬다고 이 둘을 완벽하게 분리하니, 가능한 질문이었다.      

그 외에도 페미니즘 교육과 성교육을 나누는 어떤 기준들이 있다.  

           


성교육은 아동‧청소년이나 이들을 양육하는 양육자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교육이다라 보는 시선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방자지단체가 설치한 전국 성문화센터가 모두 청소년성문화센터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며, 주로 아동청소년과 양육자 대상 성교육을 할리가 없다. 대학생 대상 성교육도 어딘지 많이 들어본 적이 없다. 성인지 혹은 젠더 교육이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때문일까? 대학생 대상 출강 의뢰도 아주 가끔씩 들어오지만 대체로 생물학적 성지식에 대한 통념을 다뤄달라고 요청한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네 몸을 소중히 하라는 말만 남발하는 성교육이 문제라며 불평하면서도 페미니즘 교육과 성교육을 분리하는 시선은 결국 성교육은 2차 성징(생물학적 성지식)이나 피임(안전한 성관계)만 주로 다루는 아동청소년 대상의 교육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가능한 건 아닐까? 혹은 자신이 경험한 성교육을 성교육의 전부라고 보는 편견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생물학적 성지식만 다루는 아동청소년 대상의’ 성교육 역시 여러 기능들 중 구성된 것이며 권력의 효과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만큼 성교육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 또한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성교육을 한다는 건 대체 뭘까?     


교육에는 상반적인 역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규범을 정립하는 역할과, 규범의 재생산을 비판하는 역할.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도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교육 내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선과 교육 외부에서 처방해야 한다는 시선.      


그러다가 생각했다. 이 둘이 정말 나뉠 수 있는 걸까? 무엇이 더 중요하며 시급하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심지어 대안적인 성교육은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 주류적인 성교육과 경합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렇다면 차별금지법 제정과 같은 제도적 기반을 만들고,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에 의해 발생하는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힘을 보태주고, 자세하지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은 성교육과 성차별적인 강사의 발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같이 가야지 성교육의 내용과 방법상의 변화 또한 담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방법이 어때야 한다는 정확한 상을 그리긴 어렵다. 적어도 안전하게 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이 교사와 양육자라는 한정적인 소수에게만 부여할 수 없다는 전제만이라도 공유되었으면 좋겠다.    

  

누구도 교육 바깥에 서 있지 않다. 자신은 교육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평가만 있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강사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는 여자 청소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