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않는 마음이 가장 큰 상처가 된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게 있었다.”
— 엔도 슈사쿠, 『침묵』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에 멈춰 섰다.
몇 해 전 5·18 광주항쟁 당시 고문을 당했던 한 생존자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는 자신을 때리고, 물고문하던 이들이 고문이 끝나면 아무렇지 않게 옆에서 점심 메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게 더 무서웠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고통을 준 사람이 자기 행동의 흔적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 그 무관심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깊게 파괴하는 폭력이라고. 엔도 슈사쿠는 『침묵』 속에서 그 무관심을 ‘죄’라고 불렀다.
도둑질이나 거짓말 같은 개인의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인간이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죄. 그건 타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시선에서 비롯된 냉혹한 무심함이다.
그 문장을 다시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도 죄이지만, 어쩌면 더 큰 죄는 자신에 대한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그 상처를 어떻게 덮어두었는지를 나는 가장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나는 나를 모른 척했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하며 마음의 피를 닦지 않은 채 덮어버렸다.
그건 마치 내 안의 어린 나를 방 안에 가둬놓고
“조용히 해. 다 지난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방 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결국 침묵 속에 묻혀버렸다.
나는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스스로를 잊는 일,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짓는 죄였다.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나는 나의 인간성을 함께 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이 아플 때, 억지로 긍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건 아프다.”
그 단 한 문장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는 걸, 엔도 슈사쿠의 문장이 가르쳐주었다.
『침묵』 속에서 신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외면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묻는다.
“주여, 저는 누구입니까?”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인간다움의 증거이자
무관심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한다.
나에게 무관심하지 않기. 내 안의 작은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기.
어쩌면 그것 또한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길일지 모른다.
엔도 슈사쿠가 말한 죄의 본질은
결국 “기억하려는 마음”의 부재였다.
나는 오늘도 그 기억을 놓지 않으려 한다.
무관심은 인간이 스스로를 잃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
이 글은 신의 침묵처럼, 말없이 다가오는 ‘내면의 외면’에 대한 기록이다.
당신의 마음 한쪽에도 작은 불빛이 켜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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