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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마음에 생긴 태풍, <태풍 클럽> 리뷰

소마이 신지 <태풍 클럽> (1985) / 아트나이너 19기

by 이수미

강력한 태풍이 오고 있다.


영화 속에서 유독 아이들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 태풍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큰 혼란에 빠뜨린다. 39년이 지났음에도 <태풍 클럽>이 지닌 강렬함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파격적이다 못해 과격하기까지 한 영화의 표현 방식에 당혹감과 불쾌감을 느낀 관객들도 분명히 존재하리라.


<태풍 클럽>은 학교 안에 고립된 아이들과 학교를 벗어나 밖을 돌아다니는 리에, 두 갈래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리에는 미카미를 좋아하고, 아키라는 미치코를 좋아한다. 이건 리에와 아키라가 자신의 마음을 직접 말로 표현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는 켄과 미치코의 마음 역시 눈치챌 수 있다. 켄의 시선 끝에는 미치코가, 미치코의 시선 끝에는 미카미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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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태풍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태풍이 일기 시작한다. 집에 돌아오면 자신을 맞아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서 인사를 주고받던 켄은, 미치코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폭주한다. 스릴러를 넘어 공포 영화 <샤이닝>까지 연상되는 켄의 발길질은 그 아이의 태풍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고,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망. 켄은 미치코가 교실 문을 열고 자신을 맞아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켄의 태풍은 미치코와 자기 자신에게 상처만을 남긴다. 그 태풍이 미치코에게 준 상처를 직면했을 때 비로소 켄은 태풍의 근원, 태풍의 눈으로 들어간다. 그제야 켄은 그 태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리에의 태풍은 어떠한가? 리에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고민하는 대신 행동으로 실천하는 인물이다. 리에 역시 켄처럼 어른의 결핍(켄은 아버지, 리에는 어머니에 대한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분출된다. 이대로 살면 미카미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시골 여자가 되어버릴까 봐 리에는 떠난다. 더 큰 세상, 더 멋진 어른이 하루빨리 되기를 꿈꾸면서. 하지만 그런 리에가 직면한 건 이상한 어른들과 거대한 태풍이다. 리에를 도와준 대학생 남자는 리에를 성적 대상으로 보고, 오카리나를 부는 두 사람은 기이한 존재로 보인다. 리에는 결국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벌써 어른이 되기에 리에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


<태풍 클럽>의 아이들은 각자의 태풍을 분출한다. 자신의 사랑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어른들에게 대들고, 가출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휘몰아치는 자기감정의 근원, 태풍의 눈 상태에 빠진 후 그 태풍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문제는 미카미다. 미카미는 영화 속에서 가장 '어른'에 가까운 아이다. 어른인 우메미야 선생과 마찬가지로 주변 친구들의 행동이 이상하게만 보인다. 미카미의 태풍 역시 다른 아이들의 욕망과는 조금 다른 철학적인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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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종족을 뛰어넘을 수 없는가'


자신은 분명 또래 아이들과 다른 '개인'이지만, 개인이 종족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우메미야 선생 같은 평범한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는가. 켄과 미치코가 태풍의 눈에서 빠져나와 춤을 추는 동안에도 미카미는 고민의 태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중에 가서는 친구들과 함께 정신없이 춤을 추기도 하지만, 그건 찰나의 망각일 뿐이다. 아이들이 잠들고 밖의 태풍마저 지나간 새벽, 미카미는 그제야 태풍의 눈 상태에 빠진다. 그 속에서 깊은 고민 끝에 미카미가 내린 결론은 종족을 위한 개인, 자신의 희생이다. 하지만 미카미의 이 희생이 정말로 종족, 다른 아이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영화의 초반부 미카미와 그의 형은 개인과 종족,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미카미의 형은 닭이 '종족'이고 달걀이 '개인'이라면, 경험이 있는 닭이 다음에 낳을 달걀을 바꿀 수 있는 거라고 말했다. 필자는 그 말이 종족이 그다음 세대의 개인을 바꾸는 건 가능하지만, 개인이 지금의 종족을 바꿀 수는 없다는 말로 느껴졌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실까 봐 걱정하는 어떤 아이에게 다른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멸망하지 않아." 비장한 말을 남기고 투신한 미카미의 마지막 모습이 전혀 엄숙하지 않게 그려진 걸 보면 감독 역시 미카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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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밖에 나오니 거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애매한 거리라 우산을 따로 사지는 않고, 얇디얇은 <태풍 클럽> 포스터를 우산 삼아 집으로 뛰어갔다. 우산 없이 가야 하는 빗길은 너무나 차갑고 무서웠다. 내 위로 비를 막아주는, 듬직한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무섭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영화 속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태풍 클럽>의 아이들은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태풍이 왔을 때 그들을 지켜줄 어른이 그 아이들의 곁에는 없었다.


지금의 나는 이 아이들의 우산이 되어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나. 필자도 평범한 어른이 되어버린 건지, 우메미야 같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미카미의 말보다 나이 먹으면 누구나 마찬가지라는 우메미야의 말이 더 깊숙이 와닿는다.


* 윗글은 아트나이너 19기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으로, 아트나인 공식 카페와 블로그에도 업로드 되어있습니다. 개인 아카이브용으로 브런치스토리에도 업로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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