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니 모레티 <찬란한 내일로> (2024) / 아트나이너 19기
필자는 학생 시절 동네 극장에서 홀로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그때는 '영화'보다 '극장에서 영화 보는 행위' 자체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한국 상업 영화 위주로 영화를 접했고, 독립예술 영화가 있다는 건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영화를 사랑하게 된 지금은 독립예술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간다. 가벼운 팝콘 무비도 물론 좋지만, 감독의 색깔이 뚜렷한 작가주의 영화가 보고 싶다. <찬란한 내일로>의 조반니는 이런 필자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인물이다.
조반니의 머릿속은 영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조반니는 직업부터가 영화감독이고, 와이프와 딸도 영화 업계 사람이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는 가족들과 자크 데미 감독의 <롤라>를 꼭 함께 봐야 하고, 자면서조차 영화에 관한 꿈을 꾼다. 영화와 관객을 상처입히는, 폭력적이고 진부한 연출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시네필'은 분명 조반니 같은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생긴 단어일 거다.
필자는 조반니가 영화를 사랑하다 못해 스크린 속으로 들어간,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인물로 느껴진다. 조반니를 연기한 배우가 영화의 감독 난니 모레티이기 때문이다. 난니 모레티는 <찬란한 내일로>뿐 아니라 자신이 감독한 거의 모든 영화에서 직접 주연을 맡아 연기했다. 감독이 연기까지 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자기가 감독한 영화에 자기가 출연하는 건 생각보다 꽤 흔한 일이니까. 하지만 난니 모레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만의 영화 제작사 '사케르'를 설립하고, 그것도 모자라 배급사까지 세웠다. 젊은 감독들의 단편 영화를 상영하는 '사케르 영화제'를 개최해 신인 감독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난니 모레티의 영화 사랑 이야기는 이쯤 하고, 다시 <찬란한 내일로>로 돌아와 보자. 영화 속 모든 설정은 극단적으로 배치된다. 조반니가 사랑하는 작가주의 영화와 조반니의 아내가 참여한 상업 영화, 영화를 위해 제작된 소품과 현실에서 쓰이는 공산품, 조반니의 딸 엠마와 남자 친구라기엔 심하게 나이가 많은 예로치까지. 조반니가 이해할 수 없는, 조반니를 이해해 주지 않는 시대가 찾아왔다. 폭력을 그저 오락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다들 이렇게 영화 찍고, 이런 영화 본다'는 대답뿐이다.
영화며 현실이며 조반니의 뜻대로 굴러가는 건 하나도 없다. 아내는 자신을 떠나고 싶어 하고, 영화는 투자 문제로 제작이 중단된다. 난니 모레티는 블랙코미디를 유지하며 현실적인 결말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여기서 현실성이 다소 떨어지는 설정을 도입한다.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난 한국 투자자가 조반니의 천재성을 알아본다는 설정이다.
조반니 역시 비극적인 실제 역사 대신 낙관적인 허구의 역사로 영화의 결말을 바꾼다. 현실이었다면 조반니는 아무에게도 투자를 받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노장 취급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난니 모레티는 자신이 만든 영화 속에서라도 해피엔딩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무리 불행한 현실이라도, 기적이 찾아와 해결될 거라고. 이 영화를 볼 때만큼은 마음 푹 놓고 웃고 즐기라고. 난니 모레티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관객들에게 경쾌한 위로를 건넨다.
사람들은 때로 퍽퍽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영화를 본다. 현실을 담담하게 담은 영화도 좋지만, 때로는 비현실적일지라도 낙관적이고 유쾌한 영화가 보고 싶다. 간만에 활짝 웃으며 영화관을 나왔다. 영화 속 조반니처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싶어졌다.
* 윗글은 아트나이너 19기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으로, 아트나인 공식 카페와 블로그에도 업로드 되어있습니다. 개인 아카이브용으로 브런치스토리에도 업로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