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공드리 <공드리의 솔루션북> (2024) / 아트나이너 19기
<이터널 선샤인>은 모두가 인정하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대표작이자 감독에게 영원한 꼬리표로 남을 작품이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일을 시작한 미셸 공드리는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과 두 편의 작품, <휴먼 네이쳐>, <이터널 선샤인>을 함께 했다. 찰리 카우프만은 <존 말코비치 되기>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각본가이기도 하다.
<이터널 선샤인>과 <존 말코비치 되기>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터널 선샤인>은 인간의 기억과 감정을, <존 말코비치 되기>는 인간의 정체성과 욕망)을 SF적 상상력과 결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휴먼 네이쳐> 역시 앞서 언급한 두 작품보다 SF적 요소는 적지만, 인간의 원초적 본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 세 작품은 '인간 본성 3부작'으로 묶여도 손색없어 보인다.
감독의 첫 두 작품을 같은 각본가와 작업하다 보니 찰리 카우프만 작품의 특징이 미셸 공드리 작품의 특징인 것처럼 혼동될 수 있지만, 미셸 공드리의 관심사는 찰리 카우프만과 다르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특정 개인의 이야기를,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엉뚱한 상상력'을 영화 속에서 구현하는 데에 미셸 공드리는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미셸 공드리가 직접 각본을 쓴, <수면의 과학>은 감독의 개성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감독의 특기인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디어와 환상적이고 독특한 비쥬얼은 극대화되었지만, 플롯은 너무 날 것이다 싶을 정도로 산만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작품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면, <수면의 과학>은 미셸 공드리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놓은 다음 그대로 펼쳐 놓은 듯한 영화다.
현실과 꿈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주인공 스테판은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자신의 손으로 구현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미셸 공드리는 실제로 손이 커지거나 하늘을 나는 꿈을 꾼 적이 있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스테판이 자신과 매우 닮은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감독 자신이 투영된 인물은 <수면의 과학>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보리스 비앙의 소설 <세월의 거품>을 원작으로 한 <무드 인디고>의 주인공 콜랭은 스테판과 무척이나 닮았다. 콜랭과 스테판은 발명을 좋아하고(<수면의 과학>에는 1초 타임머신이, <무드 인디고>에는 칵테일 피아노가 등장한다), 금사빠에 회피 성향, 욱하는 성격까지 마치 형제처럼 비슷하다. 2016년에 개봉한 <마이크롭 앤 가솔린>은 감독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마이크롭 앤 가솔린>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면, 어린 미셀 공드리는 당시 제일 친했던 친구와 함께 차를 한 대 만들어 프랑스를 여행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항상 기름 냄새가 났고, 손재주가 좋았던 그 친구는 영화 속에서 별명 '가솔린', 테오라는 이름의 캐릭터도 재현된다. 자연스럽게 그 옆에 있는 주인공 다니엘은 감독 자신이 투영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마이크롭 앤 가솔린>은 <수면의 과학>과 대척점에 있는 영화다. 감독의 가장 큰 특징인 몽환적이고 기발한 상상력의 세계는 이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다니엘과 테오가 발명을 하기는 하지만, 이전 작품들처럼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면은 없다. 그렇기에 혹자는 이 작품을 두고 가장 미셸 공드리 답지 않은 영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발명품에 눈을 반짝이고, 기차에 반대로 앉아 거꾸로 가는 세상을 발견하는 다니엘의 모습에서 우린 감독이 되기 전 어린 미셸 공드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다소 평이한 성장 영화의 구조를 띄고 있기는 하지만, <수면의 과학>과 비교하면 플롯 역시 많이 다듬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이크롭 앤 가솔린>은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마구 분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갈 줄도 알게 된 감독의 성장이 엿보이는 영화다. 역설적으로 가장 미셸 공드리다운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이크롭 앤 가솔린> 인터뷰 당시 미셸 공드리는 현재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건 감독으로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 된 거라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미셸 공드리는 다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과거가 아닌 현재, 감독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그 영화가 바로 2024년에 개봉한 미셸 공드리의 신작 <공드리의 솔루션북>이다.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영화 제작에 대한 공드리의 지독한 농담 같은 영화다. <무드 인디고> 제작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우리는 감독이자 어른이 되어버린 미셸 공드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지만 예술적 재능은 특출났던 꼬마 다니엘은 스태프들을 고생시키는 천재 감독 마크로 자라났다. 마크는 자신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작 중단의 위기까지 맞은 마크는 영화를 지키기 위해, 영화를 들고 도망친다.
시시콜콜하게 계속되는 공드리의 유머는 빵 터지지는 않아도 우리를 계속해서 키득거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스파게티는 나를 밀치고, 집에 침입한 누군가 쏜 총을 사전으로 막아내고, 판타지와 누아르와 멜로를 넘나드는 <공드리의 솔루션북>을 보고 나면 당신은 미셸 공드리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혹은 정반대의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이 영화를 보았다. 여러분도 그러기를, 그랬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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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bwvTW0lMVc?si=ZN4KXP-Si70gjYMj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여우 막스'는 미셸 공드리의 3분짜리 애니메이션 <Haircut Mouse>를 떠올리게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새해를 축하하며 업로드된 영상이다. 참 엉뚱한 감독이다.
* 윗글은 아트나이너 19기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으로, 아트나인 공식 카페와 블로그에도 업로드 되어있습니다. 개인 아카이브용으로 브런치스토리에도 업로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