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 거무스레한 때가 모서리 틈에 잔뜩 낀, 낡은 문. 그 문이 열리고. 조심스레 피터 파커가 방 스위치를 켠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허름하고도 누추한 원룸이 펼쳐진다. 누우면 삐걱대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침대에, 그 옆에 놓여있는 클래식하고도 노말한 스탠드. 그리고 과연 불이 켜져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어두운 벽지. 금방이라도 꺼질 거 같이 희미한 조명. 불에 그을린 듯, 성능조차 의심케 하는 선반.. 곳곳의 흔적들.. 마치 죽은 화석을 연상케 한다. 피터 파커는 그 광경을 한동안 응시하고는, 조용히 짐을 풀기 시작한다. 지난날의 유산들 중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 팰퍼틴 레고 피규어를 책상에 놓으면서 시작.
그리고, 그는 치지직 거리는 무전기 소리와 함께 다시 스파이더맨 옷을 입고, 우리에게 익숙한 스파이더맨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당시 내가 느낀 감성은 아래와 같았다.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야 진정한 새 출발이 시작되는 법이다.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지워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당시 나는 내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썼었다.
아예.. 모두 상실하고 싶다. 내가 이 회사에 다니면서 알아왔던 사람들 모두.. 그 사람을 보면 그 시절, 내가 힘들어했던 느낌들이 되살아날 거 같아서..
...
그 시절 동안 터득하고 배웠던 기술들만, 나만의 팰버틴 레고 피규어처럼 남겨두고, 나머지 전부.. 상실해보고 싶다.
그리고 그때, 그 당시 내가 말했던 대로 전부 상실해 버리게 되는 상황을 겪게 되니, 정말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나는 판교에서 노란 톡으로 유명한 IT 기업에서 근무했었다. 그곳에서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회사 내부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회사 외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 브런치스토리 작가명인 노아라는 이름도, 출판사에 번역가로서 출판을 했던 이력도, 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연봉을 받게 되었던 것도 모두 그 회사를 다니게 됨으로써 이룰 수 있었던 성과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을 떠나야 했다.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판교에 맨 처음 입성했을 때, 이제 판교에서 새로 내 커리어가 시작되는구나!! 하고 엄청 설렜었다. 주변에도 자랑하고. 특히, 회사 컴퓨터로 맥북을 지급할뿐더러, 웰컴 키트까지~ 자랑을 안 할 수가 없었지. 또한, 유명 호텔 숙박비, 뮤지컬 티켓 할인까지.. 정말이지, 내 세상인 듯 느껴졌었다.
그래서였을까? 은연중에 주변 사람들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고는 했었다.
“나, 옐로우톡에 다녀~~ 자회사이긴 한데~~”
“야, 너도 이직 가능해~~ 큰 회사에 다니면, 느끼는 게 많아~”
그 말에 나라는 사람에 대한 내용은 없었고, 오로지 회사에 대한 내용만 있었다. 내 오리지널리티는 없었고, 그 회사의 오리지널리티를 내 오리지널리티인 양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건, 신디에게 대하는 태도로도 이어졌고. 그렇게 몇 년을 보내왔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쭐대던 그 시간,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했음을.. 그때의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 당시 신디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자긴, 그 회사에서 혼자서 고립시키려고 하는 거 같아.”
당시 퇴사하려던 나에게 인사 팀장님이 이런 질문을 남기신 적도 있었다.
“노아는 항상 보면, 혼자였어요.. 이유가 있는 거예요?”
주변 팀원들도 나에게 동일한 류의 질문을 했었다.
“노아는 왜 밥을 혼자 먹는 거예요?”
그 오랜 시간 내내, 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동일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려고 한다는 것.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그 고립이 스스로를 정체시켜 왔으며, 그 정체가 곧 그날의 퇴사로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왜 밥을 혼자 먹어요?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때부터 들어왔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답변을 나로서는 할 수 없었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줄곧 이거였기 때문에.
“실은요. 저는 중학교 때 따돌림을 심하게 당했었어요.
그때,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배신당하는 등 제가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구타도 당했었고요.
장난이라는 이유로 제 가족까지 모멸당하는 등 시간을 보냈었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믿을 수 없게 되더라고요.
제가 마음을 주면, 또다시 그때처럼 배신당해 왕따를 당하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혼자가 편하더라고요.
혼자라면,
적어도 배신을 당하지 않잖아요. 상처도 안 받고요.”
그러나 그러한 내 답변들은 전부 괄호 안에 들어간 채, 이렇게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그냥요~~ 전 이게 좋아요~”
이러한 성향은, 카페 가는 일에도 이어졌으니. 업무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회사 동료들이 카페를 가자고 했을 때도 나는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노아, 카페 가시나요?”
“아뇨~ 저는 업무 할 거예요~ 할 일이 있어서요~”
그 시간 하나하나마다,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말하면서 내 고충을 말하거나 내 성과 등을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때로는 내 동료들의 고충을 듣거나, 다른 부서 상황 등을 들으면서 소식들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시간의 부재로 인해, 그 공백이 차츰 커져가 퇴사로 이어지게 될 줄이야.. 그때의 나는 몰랐으리라.. '
퇴사할 때 즈음, 에디가 나를 따로 불렀었다.
“노아~ 이따 퇴근하고 시간 돼요? 시간 되면, 같이 저녁이나 먹죠~”
아니, 퇴사하는 마당에 내가 왜? 이 아저씨 왜이래? 싶었으나 애써 이런 마음 숨기며..내가 가만히 미소 짓자, 에디가 웃으며 말했다.
“싫은 거 아는데, 그래도 같이 가시죠~~”
이에, 나는 속으로 엄청 에디를 원망한 채, 같이 근처 술집에 가서 술잔을 기울였었다. 소주 3~4잔 정도 마신 에디가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노아. 노아는 제가 어떤 사람 같아요? 노아 글 쓰는 거 좋아한다고 하셨죠? 드라마 보는 것도 좋아하시고요~ 그거 알아요? 저도 드라마 보는 거 좋아해요~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요.”
이에 나는 무슨 이 아저씨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 싶어서 코웃음 쳤었다. 그냥, 핑계 대고 빨리 집 가야지. 그런 내 반응을 알기라도 하듯, 에디는 조용히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소설 속 한 대사를 읊으셨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대사는 나를 놀라게 했으니.
“드라마 스타트업을 비롯해서, 이태원 클라쓰 등.. 많은 드라마들 즐겨보는 거 좋아해요. 특히, 드라마 스타트업 ost 미래라는 노래는 정말이지.. 설렘을 자극하면서 청춘이라는 걸 잘 드러내는 곡인 거 같지 않아요?”
와우.. 이 아저씨 뭐지?? 이후 이어지는 그의 말에 마치 내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내 관심사와 겹치는 게 많았다.. 그러한 내 반응에 에디는 웃으며 말했다.
“놀랐죠, 노아? 이 아저씨 뭐지? 싶고.”
“네.. 정말.. 이요.. 보통, 그런 드라마를 중년 이상의... 분이.. 좋아하실 일이 없잖아요..”
에디는 웃다가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실은 전,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에요.
드라마 좋아하고, 소설 보는 거 좋아하고요.
다만, IT 개발자라는 특성상, 그러한 취향을 숨기는 거뿐이죠.
회사에 가는 순간, 그러한 제 개인적인 취향은 전부 내려놓고, 회사에 맞는 제 모습을 드러내는거 같아요.
...
일종의 가면 같은 거죠.
회사에서는요. 노아..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 모습을 버리고, 그 회사에 맞는 모습으로 임해야 해요.”
내 개인적인 취향, 모습을 버리고, 그 회사에 맞는 모습으로 연기를 하는 거라.. 맞는 걸까? 그래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괴리감이 커지지 않을까? 그 때문에 힘들 것이고.. 에디는 나를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노아도 아마 느끼게 될 거예요. 그리고, 퇴사하고서 저 많이 생각날걸요? 생각보다 IT 업계에서 저 같은 사람 찾기 힘들어요..”
그 사람의 말대로, 퇴사하고 나서, 그 사람이 생각나긴 한다. 그 사람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퇴사즈음에 에디가 나에게 해주었던 그 말이 잊히지 않아서였으리라..
“노아, 다음 회사가 어디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노아가 사람들과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에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제가 말했듯이, 노아의 개인적인 모습, 취향 같은 걸 버리고, 그 회사에 맞는 새로운 노아의 모습으로요.”
그렇게 에디와 나의 밤은 깊어져만 갔고. 밤새 술잔을 기울였었다. 그리고 다다른 회사 마지막 날. 나는 에디의 배웅을 뒤로한 채, 그 회사를 퇴사하였다.
퇴사하는 순간,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홀로 떠나는 내 곁에 있었던 건 그 회사에 재직하면서 터득했던 기술들 뿐이었다. 허무했다. 그 오랜 시간 일하면서, 나에게 있는 거라곤 고작 기술들 뿐이라니. 그 기술들도 불멸이 아닌,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 뿐인데.. 한때에 그치는 기술이 아니라, 오래토록 남는 사람에 신경써야 했음을.. 이제야 알게 되어서 서러웠다. 후회스러웠다.
이때, 비로소 알수 있었다. 그날, 에디가 나에게 말해주었던 교훈을. 그 많은 시간, 사람들이 나에게 했던 말을. 내가 이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너무나 나는 수동적이었다..
아무리 질문하여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모른다"였을지라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 보거나 알아보자는 제안을 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 어떠한 성과가 있었을 때, 상사의 같이 저녁 먹자는 제안에 응해서 같이 밥 먹으면서 나에 대한 어필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때로는 면담을 요청해, 회사에서 내가 겪었던 고충에 대해 말하면서 조언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카페에 가자고 할 때마다, 같이 가서 많은 얘기를 하면서 나에 대한 얘기도 하면서 나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니, 소통할 때 이런 미숙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내 시도와 진심이 쌓이고 쌓여서 같이 협력해서 업무를 할 때,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지 않을까?
나에게 기회는 언제든 많았다. 무수히 많은, 선택의 기회들이 많았으나, 그때의 나는 애써 외면하기만 했었다. 그중 단 하나의 갈림길 중 다른 길을 갔었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내 일기장을 통해, 그 시기를 뒤돌아보았다. 퇴사하기 몇 달 전쯤부터 그때의 나는 이미 그 특유의 직감으로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장차 나에게 닥치게 될 위기와 상황을. 그리고 그때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충분히 경고했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매너리즘과 익숙함에 묻혀왔고. 결국 이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나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한 대가는 결국, 파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 좋은 일들만 있었나? 그건 또 아니다. 이 회사를 통해 얻었던 것들도 많았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거.
기술은 계속 진보하며, 그 성장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 조직은 곧 도태된다는 거. 그리고, 진심으로 업무든 사람이든 대하면, 사람들은 그 진심을 알아준다는 거. 혼자서 데브옵스 업무를 해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내 노력을 격려해 주었고 많은 조언도 해주었었다. 내가 하는 많은 질문들에 대답은 해주지 못했을지라도, 같이 고민은 해주었다. 그 고민 만이라도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감동이었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은 나에게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고 싶어 했다. 정작, 그 손길을 외면한 건 나였다. 떠나야 할 때가 되어서야 후회가 되었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해볼걸..
이제는 다시 걷지 못할 퇴근길에서, 뒤돌아서 회사를 보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오늘, 내가 느끼는 감정.. 배웠던 교훈을 잊지 말자. 나는 내 스스로 이곳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모든 일은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이 세상은 나 혼자서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 바뀌지 못한다해도, 주저하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바꾸기 위해 조금씩이라도 노력해보자. 체계가 없다면, 멘토가 없다면. 내가 그런 멘토가 되어 체계를 만들어 나가자. 서로 모른다고 해도, 같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노력을 해보자. 절대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고,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구습, 구태 등에 절대로 타협을 하지 말자.
별거 아닐지라도, 매일매일 커피 한잔, 밥 한끼가 주는 나비효과를 절대로 잊지 말자. 동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음성을 통해 세상을 향해 소통해나가자. 내가 어떤 사연을 가졌을 지라도, 그 사연으로 인해 세상과의 소통을 외면한다면, 단절한다면 그길은 나에 대한 파멸로 이어질 것이니.
세상은 나에게 손길을 내밀고 있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미세한 손길을 외면하지 말자. 더 이상 과거에 메몰되지 말자. 과거의 생각에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자.
한동안, 회사를 응시하다가 다시 판교역으로 향한 나. 그리고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와 함께 그렇게 판교를 뒤로 한채, 또다른 곳으로 한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일 후.
금천구에 있는, 이름 있고도 무명인, 가장 높고도 낡은 곳.. 그 회사의 사옥 앞에 이르렀으니. 판교에서 보았던, 화려함은 없었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을 만큼, 오래 퇴적된 때가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을 듯한 느낌의, 낡고도 허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자기야.. 너무.. 여기, 생각보다 너무...낡았는데?”
“와..”
그러나, 왠지 모르겠지만 미소가 났다.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에 대한 설렘이었을까..
아니면, 과거와 다른 현실 앞에 들켜버린 당황함이었을까..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야 진정한 새출발이 시작되는 법이니..
나는 다시 시작인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페이즈의 시작일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판교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메시지들을 잊지 말자. 그 초심을 잊지 말자..
신디의 손을 잡고, 미소 지은 채 나는 한동안 회사 사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새 회사에서의 첫출근을 앞둔 채..
그렇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