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에 대하여

풀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by Life Doctor 이기원

겨울 뒷뜰은 비움의 전시장입니다. 화려했던 꽃잎은 흙으로 돌아가고, 무성했던 활엽수들은 제 살 같은 잎들을 떨구며 생존을 위한 처절한 요약에 들어갔습니다. 그 적막한 여백의 한가운데에 1년 전 조릿대 몇 포기를 심었습니다. 대나무는 사군자(四君子)의 반열에 오르며 수천 년간 동양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온 상징입니다. 하지만 대나무가 진정 위대한 이유는 그 '높이'에 있지 않고 그 '비어 있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조릿대의 줄기를 가만히 만져보면, 텅 빈 속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핍이 아니라 수용을 위한 여백입니다.

한겨울의 추위는 사물의 본질을 투명하게 드러냅니다. 겉치레에 치중했던 것들이 찬 서리에 시들어갈 때, 조릿대는 오히려 그 푸르름을 날카롭게 벼려냅니다. 모두가 잠든 듯한 겨울 정원에서 조릿대의 초록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것은 죽음 같은 고요 속에서 울려 퍼지는 생존의 함성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댓잎들이 부딪치며 내는 ‘사각사각’ 소리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을 가시화 하며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뒷뜰의 조릿대를 보며 생각합니다. 진정한 강인함은 타인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모진 환경 속에서도 나다움을 잃지 않는 태도에 있다는 것을요. 겨울의 혹독함이 깊어질수록 조릿대의 푸르름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내 마음의 뜰에도 그런 마디 하나, 푸른 잎사귀 하나를 깊게 심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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