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설이다.

by Life Doctor 이기원

이제 곧 민족 최대 명절 설이다. 설이 오면, 세상은 잠시 속도를 늦춘다. 늘 바쁘게만 달리던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흩어져 있던 시간들이 다시 한 상에 모인다. 설은 달력 속 하루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조용히 확인하는 날이다.

어릴 적 설은 기다림의 이름이었다. 새 옷의 바스락거림, 떡국 냄새가 배어든 아침, 마당을 가득 채우던 웃음소리. 그때의 설은 축제였고, 마을은 하나의 집처럼 들썩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설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멀리 흩어졌고, 기차역은 붐비는데 집 안은 조용해졌다. 설이 오는데도 마음이 덜 설레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명절이 아니라 ‘함께하던 시간의 밀도’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잘 지냈느냐고. 그 질문은 부모님의 안부 속에 숨어 있고, 차례상 앞에 놓인 조용한 절 속에 담겨 있다. 바쁘다는 말로 미뤄둔 마음들이 이날만큼은 자리를 찾는다. 세배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가장 정직한 표현이다. 그리고 떡국 한 그릇은 한 살을 더 먹는 의식이기보다, 삶이 또 한 번 무사히 이어졌다는 감사의 확인서 같다.

설날의 풍경은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오래된 이름들을 다시 부르는 마음,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다시 떠올리는 마음. 그래서 설은 늘 조금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 마치 겨울 끝자락의 햇살처럼, 차갑고 긴 계절을 견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작은 위로 같다.

올해 설에는, 거창한 다짐보다 조용한 마음 하나를 품어보고 싶다. 잘 살아내자고. 서로에게 덜 미안하고, 조금 더 다정하게. 우리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고. 설은 매년 오지만, 같은 설은 다시 오지 않는다. 같은 얼굴로 웃을 수 있는 시간도, 같은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 순간도, 생각보다 오래 주어지지 않는다.

떡국을 먹고 나면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설이 남기고 가는 잔향만은 오래 남았으면 한다. 누군가의 손길, 오래된 밥상, 따뜻한 인사 한 마디. 그런 것들이 삶을 버티게 한다는 사실을, 명절은 매번 조용히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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