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는 트레드밀에서 내려오는 것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당연히’ 수능은 봐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대학교는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취업이 어려우니 조금이라도 ‘특별나기 위해’ 대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수업료를 내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치열한 대학교 생활을 지나 ‘더’ 치열하고 촘촘한 약육강식의 세계인 ‘대학원’을 다녀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고 마치 레벨업을 하듯 나의 전문성을 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미 금이 가고 깨져버린 독에 끊임없이 나의 부족함을 바라보며, 사실 물이 새어나가는지도 모른 채 에너지와 나의 시간으로 만들어진 물을 매번 바가지로 퍼서 끊임없이 부어 찰 기약이 없는 큰 장독대를 채워야 한다는 미션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언제 차게 되어 바가지를 내려놓고 숨을 고를 수 있을지 모른 채.
세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매체와 말 속에서 ‘생존해야 하니까,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작게 보고 개발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멈추지 않는 트레드밀 위에 오른 것처럼 꽤 긴 시간을 살아왔다.
언제쯤 이 트레드밀에서 내려도 되는지 조마조마해하면서, 혹은 트레드밀을 꺼버린다면 마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낀 채로.
그러나 한 곳, 한 곳에 몸과 정신에 이상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섬광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마’라는 말이 항상 붙어 있었다.
그중에 ‘그나마’ 이게 좋으니까
다들 이렇게 한다고 하니까.
스포츠에 관심이 있으면 올림픽 출전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음악에 관심이 있으면 콩쿠르 정도는 나가서 상을 휩쓸 정도는 해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춤을 좋아한다면 소속사에 들어가 데뷔 정도는 해야 그 자격이 부여된다고 생각했다.
근데 진짜 인생이 모 아니면 도인가?
진정 인생이 ‘뾰족점’만이 의미가 있어 이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두가 같은 시합을 벌이다가 그 ‘뾰족점’에 이른 이들을 우러러보며 박수 쳐주다가 대부분의 인생은 사라지고 마는 그런 메커니즘이 전부인가?
10의 80승이 우리가 사는 우주의 전체 원자 수이고,
10의 70000승이 인간이 가지는 유전자끼리 일어날 수 있는 상호작용의 숫자라고 한다.
광활하고 미처 다 담기조차 어려운 이 은하와 우주보다도 더 정교하고 복잡한 상호작용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고작 그 ‘뾰족점’ 하나만 바라며 목을 빼고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라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검정 아니면 흰색만이 답이라고 하는 것처럼.
회색에도 종류가 수천, 수만 가지인데
그것들을 다 걷어내고 ‘제대로 된 것’ 아니면 다 의미 없다,
꼭대기, 서열 1위가 아니면 의미 없는 것쯤으로 치부되는 분위기 속에서 매일 작아져 갔으며 끊임없는 경쟁의 시나리오 속에서 패자부활전만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내 30대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환경을 먼저 바꾸자는 생각에 행복한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북유럽으로 도망갔으며, 쉥겐비자 90일 중 일주일을 남겨놓고 독일에 취업이 되어 독일로 들어오게 되었다.
나의 20대 끝자락에 만난 유럽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이제는 숨을 고르는 법, 나만의 속도를 찾는 법, 남과 비교하지 않는 법을 익혀 갔으며 내가 말초적으로 진정 기뻐하고 원하는 것을 마치 주파수를 감지하는 금속 탐지기처럼 예민하게 반응해 탐지하는 작업들을 쌓아왔다.
‘음악을 하면 먹고살기 어렵다. 일단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 속에서 나의 가능성은 오로지 회사에 소속되어 매달 나오는 월급을 받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삶이라는 것이 다양한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다고 주제를 ‘회사’에서 ‘개인 창작’으로 바꾼다고 해도 창작의 세계야말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말 그대로 ‘반열’에 오르는 것 역시 주관적이고 기약 없는 마라톤과 같은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도 먼저 앞서간 이들과, 말 그대로 ‘스타’의 위치, 쏟아지는 관심과 일명 ‘몸값’이 높은 이미 보증된 보증수표 같은 개인 브랜딩과 이름을 가진 채 활동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며 오래전 느꼈던 자기 검열과 비교에 쉽게 빠지고 시달리게 된다.
나는 언제쯤?
나에게도 저런 기회가 올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걸까?
라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이 자주 떠오르다가도 하루는 ‘당연히 할 수 있지!’라는 도전적인 생각과 눈에 보이는 현실 앞에서 ‘그럼 그렇지’라는 자조적인 생각이 하루를 멀다 하고 바뀌기도 한다.
그렇지만 요즘 깨닫는 것은 더 이상 내 인생과 시간이 어떤 목표와 지점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마라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타인이 매기는 성적표와 관심, 인정과 상관없이 온전히 채워지는 내 안의 충만함과 만족만으로도 꽉 채울 수 있는 것이라는 것.
기준을 더 이상 ‘달성, 성취, 쟁취’에 두는 것이 아니라 매일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충만감과 이미 온전한 나를 꽉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미 장독대가 차고 넘쳐 흐르도록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이제껏 다른 지점과 다른 이들이 이룬 것들을 보며 나 자신을 보채고 무너지고 짓이겨지기만 했는데, 더 이상 그 무게 중심을 타인과 외부 세계에 두지 않고 시선을 거두어 나 자신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타인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알려지지 않더라도 나는 나의 시간을 차곡차곡 채우고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스스로 채운 사슬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도 하루는 앞이 깜깜하고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의식한 채 억지로라도 나를 깨워 바깥의 공기를 마시게 하고 뛰게 하고 햇빛을 쬐게 한다.
마치 나 자신을 내가 양육하는 것처럼.
내가 세운 지옥과 감옥에서 벗어나 진짜 마주해야 하는 것, 진짜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시하게 하기 위해서.
이 행군과 하루하루의 훈련이 이미 오랜 시간 속에서 습관화되고 체득되어 그 악의 순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남은 나의 인생 속에서 더 이상 악의 쳇바퀴 속에서 나를 태우며 살고 싶지 않기에 끝이 없던 트레드밀의 종료 버튼을 누른 채 나를 내려오게하고 대신 잘 다독여 밖으로 나가게해 외부를 바라보던 시선을 스스로에게 초점 맞추게하고 하루하루 햇빛을 쬐며 숨을 돌리게 하고 있다.
이러다 보면 더 건강해져서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당당히 이겨내며 웃을 수 있기를 고대하며, 오늘도 ‘모’와 ‘도’ 사이 어디엔가 존재해도 된다고 나를 다독이며 오늘도 세상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