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일, 그리고 계속 가는 일

그렇게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by nabiee 노은

성과가 빨리 나지 않는 일을 할수록
결국은 꾸준함의 싸움이라는 걸 깨달은 이후,


나는 ‘지속하는 힘’,
즉 지구력을 기르기 위해 달리기를 선택했다.


원래 나는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일 외에는

집 밖으로 1m도 나가지 않아도

일주일이고, 그 이상이고
실내에서만 생활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본 투비 실내생활자'아다.

(심지어 운동도 집에서 홈트로 해결하는)


그런데
어둡고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햇살이 하루 이틀 내리쬐기 시작하니


실내 생활자인 나조차
그동안 햇살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달리기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운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KakaoTalk_20260328_215038915_01.jpg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은 도저히 뛰러 나가지 않을수가 없다.


음악을 실컷 들을 핑계가 필요했고,
그 비트에 맞춰 달려보고 싶었고,

외부,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훈련을 해보고 싶었고,

햇살 아래에서 녹아보고 싶었고,
바람을 내 살로 직접 맞고 싶었고,
공기를 내 코로 직접 들이마시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달리기로 선택했다.


결국 나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시시각각 변하는 결과에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외부에 안달하고 동요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달린다.


달리기는, 어쩌면
생존의 방법이기도 했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에게 중요했던 것들,
특히 ‘생존에 가까운 가치’만 남게 된다.


복잡했던 머릿속,
안개처럼 뿌옇고
의심으로 가득했던 생각들은


마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듯
고마운 나의 생체 시스템에 의해
힘없이 가라앉고, 결국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더 맑아진 시야,
더 명확해진 판단,
그리고 정리된 생각들이다.


그렇게 내 호흡과 달리기에 집중하다 보면
타인의 시선이나 생각은

내 신체시스템 안에서는 생존에 부차적인 것이라고 인식되는지
자연스럽게 희석되어 옅어지면서 점차 녹아 사라진다.


마치 블러 처리된 배경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전부 강제 음소거된 것처럼.


KakaoTalk_20260328_215038915.jpg 라인강변에서 내가 명상하는 장소


그 순간은
거의 진공 상태에 가깝다.

마치 수영장에서 물속에 잠겨있을 때처럼 외부 소리는 차단된 채

오직

내 숨소리와
뛰어짐을 명령받은 나의 몸의 감각만이 남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달리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마치 호접몽 속 장자처럼
내가 나인지, 나비인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타인으로부터 시작된 ‘제거’는
결국 '나'라는 존재까지 기특하게 지워낸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니까.


그 타인의 시선 와 평가에 내 생존가치를 매기던 점수표가 사라진다면
그 위에 형성되고 파생되며 채점받던 ‘나’라는 존재 역시
함께 희석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그렇게
나는 잠깐의 무아 상태,
어쩌면 작은 임사 체험 같은 순간을 경험한다.


끊임없이
'될 것이다, 안 될 것이다'를 재며 저울질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머뭇거리다가

도망가고
미래를 상상하며 뒷걸음질 치던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생존의 우선순위 속에서
자동으로 걸러내 진다.

KakaoTalk_20260328_215038915_02.jpg 내 애정하는 나무그늘 벤치

마치 깜깜했던 밤사이
청소부가 다녀간 것처럼

어둠이 걷힌 후 아침이 온 나의 머릿속은 가지런해지고
고요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리기를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부르는 걸까.

이제 나는
내게 주어진 이 경주를

이탈하지 않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에 무엇이 있든
그 결말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오늘도 달리기로 한다.

그 길의 끝에서 나를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무섭다고,
아무래도 끝까지 다다르는 것은 힘들 것 같다고

그전에 도망치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지 않기 위해

달리며 길러질 근력과
종아리와 허벅지의 힘으로

또 큰 숨을 들이쉬기 위해 어깨를 펴고

내 길의 끝에 있는 결말을
정면으로 맞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리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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