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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Nov 11. 2021

옛 동네의 칼국수

추억 소환

#옛 동네의 기억 #오늘의 행복#삶이란 작은 것


오래전에 살던 동네에 국물이 꽤 시원했던 칼국수집이 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개업했으니 벌써 이십 년이 넘은 듯하다.

칼국수 좋아하는 남편과 딸들, 

작은 딸은 칼국수 그릇을 아빠와 다투듯 끌어당기며

코를 빠뜨리고 거의 흡입하듯 먹곤 했었다.

점점 국물 맛도 변하고, 또 새로운 음식에 입맛이 기울어지면서 발길이 뜸해졌고,  

조금 먼 곳으로 이사 오고 나서는 가지 못했던 칼국수집.

그 집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어느 날 밤의 먹방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바지락과, 여러 해물을 듬뿍 넣어 진하게 우려낸 칼국수 국물, 

그 진한 국물은 감기 치료제 이기도 했었다.

  

다음날 저녁, 모처럼 남편과 옛 동네의 칼국수 집을 찾기로 했다.

아주 멀리는 아니지만 여러 번의 이사로 조금씩 멀어지던, 

떠난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옛 동네.

짧지 않은 외국생활 끝에 처음 정착한 곳이고,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이 사시던 동네여서인지  

그 느낌은 늘 정겨운 고향 같다.


오랜만에 다시 먹어본 칼국수는 맛이 그냥 그랬다.

입맛이 변한 건지,  그 집 칼국수가 변한 건지...

어쨌든 그리운 고향집 칼국수로 저녁을 먹은 흡족함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며 잠깐의 향수에 빠져 보았다.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생일파티가 늘 열리던 햄버거집,

친정 부모님 모시고 자주 가던 설렁탕집, 

어린 딸들 손잡고 거닐던 기차역 앞 둑길,

친정 엄마, 아버지께서 어린 외손녀들 아이스 하나씩 사 물리고 

머리 쓰다듬으시며 앉아계시던 공원 벤치.

저녁 어스름까지 손녀들 노는 모습 지켜보시며 흐뭇해하셨었지.

동네 구석구석 작은 기억들이 물들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데 문득 그 기억들 밑에 묵직하게 밧줄에 묶인 돌처럼 따라 올라오는 

힘들고 고단하고 슬픈 감정의 보따리.

무엇이지...

나는 왜 기억 속에 한순간도 행복했던 시절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늘 힘에 부치고, 서럽고, 뭔지 모르게 원망스럽고...

그랬었구나,

분명 귀여운 딸들과,  그때는 그래도 건강을 유지하셨던 친정 부모님이 계셨었는데.

어리고 예뻤던 아이들과 늘 곁에 계셨던 부모님과의 일상의 얽힘.

그것이 정말 작지만 또 큰 행복이었었는데,

그 시절엔 가슴을 누르는 삶에 대한 책임과 무게로 늘 헉헉거리며 살았었다.

매일매일 작은 행복들이 물방울처럼 보글보글 솟아 나왔었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가슴에 늘 무거운 돌덩어리를 품고 지냈었다.

그 기운에 눌려서 내 기억은 어두운 빛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문득, 옆자리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은 살면서 '아, 그 시절 그때는 참 행복했었구나!' 하는 기억이 있어?"

나의 물음은 항시 우문(愚問)이고 남편의 답은 항상 현답(賢答)이다.

"아, 오늘 이 순간이 나는 항상 행복한데 행복한 시절이 따로 있나!"

그래, 나는 늘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했구나.

늘 과거의 고됨과, 불확실하고 안정감 없는 미래만 붙들고

눈앞에 놓여 있는 작은 행복들을 누리지 못하며 살았구나. 

새삼 크게 깨닫는다.


삶이란 그리 거창한 게 아님을 그 나이에는 왜 몰랐을까?

그래서 내 지난 기억들은 다 어둡고 우울하고, 

아직도 그 무거움이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것인가...?

그랬었구나, 내 마음은 늘 그 순간, 그 자리에 없었구나.

가슴 한 편의 돌덩이가 툭 떨어져 나간다.


오랜만에 찾은 옛 동네 칼국수 한 그릇의 감상이 

따듯한 노을빛으로 행복하게 채색이 된다.

맛도, 양도 조금은 부족한 듯했던 저녁 칼국수 한 그릇.

서서히 배가 부르며 큰 포만감이 가슴 가득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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