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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Nov 18. 2021

홍제천의 태양

                                                                                                                                                                                                                                              

#홍제천#징검다리#시냇물#거울 같은 수면


그 옛날 홍제천은 실개천이라 부르기에는 제법 큰 시냇물이었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그 냇물은 양쪽으로 산책길과 자전거 길을 갖고 있고

그 길의 중간중간에는 운동기구들도 놓여 있다. 

또 꽃들과 나무들로 조경이 잘 되어 있어서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한동안 주위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상가, 빌라들로 채워지면서

냇물의 오염이 심해져 주변을 지나다가 코를 막고 인상을 쓰곤 했던 곳.

지금은 물도 맑아지고 시골 강변의 풀숲과 같이

여러 종의 풀들과 예쁜 들꽃들이 어우러진 경관 좋은 곳으로 탈바꿈해

삭막한 도심에서 큰 위로를 주는 곳으로 바뀌었다.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과 매연을 감안하더라도 

아침나절이나 선선한 계절의 낮 시간, 또 해 넘어간 어스름 녘 산책과 

휴식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곳으로 변한 홍제천.


일곱 살 어린 나의 눈으로 그 시절 홍제천은 작은 강 같은 느낌이었다.

실개천이 아니고, 홍수가 나면 벌겋게 성난 흙탕물 속에  여러 가지 살림 집기들과

닭, 돼지도 떠내려갈 만큼 크고 넓은 냇물.

그 냇물에는 큰 돌, 작은 돌로 만들어진 징검다리가 제법 길게 놓여 있고,

옆에 큰 돌산을 두고 있어서 많은 돌들이 굴러 내려 

냇가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돌들은 장마철이면 누런 흙탕물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모난 곳이 닳아져 

그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둥글둥글했다.

한낮의 햇빛 아래 몸을 내맡긴 그 돌들은 하얗고, 누런빛을 띠고 있기도 했고 

또 그 두 색이 섞여 신기한 무늬를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어린 나는 하굣길에 그중에서 작고 예쁜 공기 돌들을 골라 주머니에 가득 넣고

무거워진 주머니 속에서 찰방거리는 공기 돌들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여름 장마철이 아니면 물은 늘 맑고 깨끗해 바닥에 깔린 여러 모양의 돌들을 다 볼 수 있었고

물 흐름이 조용한 곳에서는 반짝이는 수면 밑으로 작은 송사리들의 놀이를 관찰할 수도 있었다.

그 냇물의 징검다리를 건너 국민학교를 다니던 나에게 

홍제천은 하굣길의 즐거운 놀이터이기도 했다.


내가 살던 집은 그 시내를 건너 언덕 기슭의 목화밭을 끼고 조금 멀리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지금은 잘 가꾸어져서 인근에 사는 시민뿐 아니라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 된 안산.

그 산 맞은편에 빨간 기와지붕을 올린 집을 짓고 이사한 것이 내가 한 네댓 살쯤 되었던 때였던 것 같다.

이른 생일도 아닌 나를 일곱 살에 국민학교에 입학시킨 아버지는 은행에 다니셨는데

출근버스를 타려면 아버지 역시도 그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출근버스는 지금은 아파트와 호텔이 들어선 홍제동 입구, 유진상가 건너편 돌산 입구까지 

직원들을 태우러 왔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아침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징검다리를 깡충깡충 건너

출근버스에 올라타신 아버지한테 손을 흔들며 등교를 했었다.

돌산 입구에서 아버지와 작별을 하고 조금 더 걸으면 

유진상가 뒤쪽에 내가 다니던 홍제국민학교가 있었다.


내가 홍제천을 생각할 때면 잔잔하게 흐르는 햇살 눈부신 시냇물이 떠오르는 한편,

아주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 기억이 같이 등장한다.


더운 여름 하굣길이었던 듯하다. 

정오쯤이었는지 태양이 머리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징검다리를 건너던 때였다. 

냇물 중간쯤 이르러 다음에 놓인 돌을 밟으려던 순간,

거울같이 잔잔한 수면에 황금빛 태양이 갑자기 내 눈에 정면으로 딱 비추었다. 

"아, 눈부셔!" 하는 찰나,

그 태양은 황금 테두리를 두른 초록과 붉은색의 불덩이로 이글이글 끓으며 점점 커지면서

내게로 와락 다가왔다!

어린 나는 너무 놀라 그만 발을 그 불덩이 속에 빠트리고 말았다.

이글거리던 그 불덩이는 붉은 홍염을 날리며 흩어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내 눈은 캄캄해지고 주위는 일시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발을 냇물에 빠트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다시 눈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징검다리를 뛰듯이 건너 집으로 내달렸다.

정말 찰나에 벌어진 그 사건.

그 시각 냇물의 수면에서는 어떤 작용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그 시각에 거울 같은 수면은 내 눈에 그 절절 끓는 붉는 태양을 반사해 던져버린 것일까? 

그 이글이글한 태양은 내겐 너무도 무서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징검다리를 건널 때마다 하늘을 먼저 쳐다보고, 

돌을 밟을 때는 절대로 냇물을 쳐다보지 않았다. 작은 가슴 가득 공포심이 들어앉았다.

그 징검다리를 건너 등하교를 하던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나게 되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그 기억은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져 버렸다고 믿었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여러 해 전 어느 날, 

홍제천 건너 안산 앞에 지어진 아파트로 이사한 동생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지금은 완전히 변해버린 동네지만 어린 시절 뛰놀던 언덕이며, 

그 옛날 아주 높게만 여겨졌던 동산들은 그대로 있었다.

내가 살던 집은 어디쯤 있었던가, 산 앞을 흐르던 실개천은 아직 그대로 흐르는지...

어린 시절 기억들을 하나씩, 둘씩 떠올리는데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무슨 일이지? 하는 순간, 

그 옛날 홍제천의 황금 테두리 속에 초록과 주황의 빛이 이글거리던 태양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이었다.

찰나의 차이이긴 하지만 나의 모든 기록을 다 담고, 알고 있는 무엇인가가

내가 기억을 해내기도 전에 신기하게도 먼저 알아챈 것. 

그래서 가슴이 먼저 뛰고 기억이 다음에 떠오른 것이었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아주 강하게 뇌리에 박혀버린 그날의 충격은 

내 가슴속 깊고 깊은 곳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는 그날의 태양이 무섭지도 놀랍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변화임을 알지만,

왜 그 옛날 그 시각에 시냇물의 수면은 거울같이 잔잔하고 주위는 조용했을까? 하는 의문은 남아 있다.


어린 시절, 돌산에서 부서져 내린 돌들이 가득한 시냇가에서 

크고 작은 돌들을 뛰어넘으며 놀던 시간들,

맑은 냇물에서 작은 조약돌을 골라 씻으며 황금 햇살 머금은 시냇물을 손에 가득 담으면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며 보석처럼 반짝이던 물방울들.

한 발로도, 때론 두 발로도 건너고 또 되돌아 건너뛰기도 하던 놀이 기구였던 징검다리.

이 따듯한 기억들과 함께, 그날  시냇물이 내게 던졌던 붉고, 푸른빛이 이글거리던 태양,

어린 나의 가슴을 쿵쿵거리게 했던 홍제천의 태양은 

이제는 내 기억의 한 페이지에 늘 떠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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