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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Nov 11. 2021

할머니의 꽃밭

#옛 추억 #할머니와 꽃


어린 시절, 할머니의 꽃밭에는 참 많은 꽃들이 서로 어울려 피어 있었다.

방세 칸의 집 규모에는 비교적 넓었던 앞마당과 집 뒤편의 작은 뒷마당.

앞마당 가운데에는 둥그렇게 큰 화단이, 대문부터 앞마당까지는 긴 화단이 

담벼락을 따라 만들어져 있었다.

붉은 벽돌을 비스듬히 꽂고 흙을 돋아 만들어진 화단에는 

형형색색의 예쁜 꽃들이 계절을 따라 쉼 없이 피고 지고 했었다.

화단을 둘러싼 붉은 돌들 틈틈이 파란 잔디 풀이 자라고, 

담벼락 앞으로 제일 키가 큰 칸나와 해바라기를 시작으로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나팔꽃, 

샐비어, 분꽃. 과꽃, 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 작약...

또 어떤 꽃이 있었던가...


아침이면  활짝 피는 분꽃과 나팔꽃, 

비 내린 다음날 아침이면 맑은 구슬을 입에 물고 활짝 웃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또르르 굴러 떨어지던 빛나는 수정 구슬들.

아침을 먹고 책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집을 나서면서 

샐비어 꽃잎을 쭉 뽑아 입에 물고 빨면 달콤한 액체가 입안에 살짝 들어온다.

봉숭아 물을 들이는 건 여름방학 행사였지.

꽃잎과 나뭇잎을 뜯어서 백반가루를 넣고 곱게 빻아 조금씩 손톱에 올려놓고 

봉숭아 이파리로 덮은 다음 실로 총총 묶고 잠자리에 들었었다.

밤새 저린 손가락 때문에 몇 번씩 깨곤 했었지만, 빨갛게 봉숭아 물이든 

예쁜 손톱에 대한 기대감은 그 작은 고통을 참고 잠들게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허술하게 묶은 손톱의 봉숭아는 빠져서 멀리 달아나 있기도 했지만,

손가락 한마디가 빨갛게 물든 열 손가락을 씻으면 만족한 웃음이 입가에 저절로 맴돌았었다.

그 봉숭아 붉은빛 여름날의 흔적은 겨울이 끝날 즈음까지 손톱 끝에 머물러 있었다.


앞마당의 둥근 화단 한가운데는 작약이라 이름한 함박꽃이 심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꽃이 크고 탐스러운 그 함박꽃을 무척 이뻐하셨다.

우리 손녀딸은 꼭 함박꽃 같다고 하시며 보랏빛 도는 붉은색 꽃잎이 탐스러운 

함박꽃을 바라보시곤 했다.

솔직히 나는 그 꽃이 그리 예뻐 보이지는 않았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얘기하실 때마다 할머니 품을 파고들며 좋아했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꽃은 과꽃이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동요를 부를 때마다 이상하게 어린 마음에도 

아릿하게  슬픈 감정이 올라오곤 했었다.

그런 느낌의 동요가 또 하나 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이 동요는 들을 때마다 "이 노래의 아이는 아빠가 안 계신 걸까? 

아니면 어디 멀리 가신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또한 서글픈 미음이 되었다.

그것이 꼭 그런 사연은 아닐 텐데도 어린 마음에는 그렇게 느껴졌었다.

이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옛 꽃들과 제목도 잊어버린 동요들이 

화사하게 만발한 꽃들로 덮인 할머니의 꽃밭 정경과 함께 그립게 떠오른다.


아침마다 열심히 꽃배달을 하는 친구가 있다.

가지가지의 꽃 사진을 꽃말, 원산지, 효능, 등등의 부가 사항과 함께 

하루도 잊지 않고 정성스레 보내주는 친구.

그 사진에는 정말 알지 못하는 예쁜 꽃들이 많다.

꽃들도 세계화가 되어서 전에는 보지도 못한 화려하고 신기한 

외래종, 수입종, 개량종 꽃들이 정말 많아졌다.

여기저기 해놓은 꽃꽂이를 보면 아주 화려하고, 풍성하며 참 아름답다.

천상의 꽃이 저런 것일까 하는 아름답다 못해 신비한 꽃들.

꽃 색깔도 아주 다양하고 예뻐서 꼭 그림물감을 섞어 채색해 놓은 것 같아

가끔씩은 조화인가 하고 만져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옛날, 할머니의 꽃밭에서 활짝 피어 수줍게 웃고 있던 그 꽃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새품종의 화려한 외래종 꽃들과는 전혀 다른 정을 느끼게 한다.

조금은 촌스럽게 치장을 하고 겸연쩍은 듯 웃고 있는 시골 소녀들 같은 모습.

가만히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그런 모습이다.


할머니는 앉은뱅이 채송화의 모래알 같은 씨를 손바닥 가득 받아 모으고, 

작은 콩 같은 까만 분꽃 씨를 받아 네모난 종이에 꼭 싸서 겨울 내내 보관하시다 

새로 봄이 돌아오면 화단을 다듬고 고운 흙에 조심스레 심으셨다.

날이 따듯해지면서 파랗게 돋아나 자라나던 새싹들. 

점점 자라서 푸른 이파리 사이로 꽃망울을 터뜨리고

봄, 여름 내내 화사한 모습을 자랑하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고 

작은 씨앗 안에 새로운 생명을 담아 내일을 준비하던 화초들.

그렇게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긴 시간 동안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을 선물하던 할머니의 꽃밭.

그 꽃밭이 오늘따라 더욱 그리워짐은 할머니가 심으셨던 분꽃, 과꽃, 채송화의 씨가 

오늘 내 마음속 화단에서 싹이 터 활짝 피어나고 있음이리라.

이제 가을이 깊어지면 나도 까만 분꽃씨를 손바닥 한가득 받아두었다

다시금 봄이 오면 내 마음 화단에 흙을 돋우고 곱게 심어 보고 싶다.


가을이 익어가는 시간,

할머니의 꽃밭에는 허리 가는 코스모스가 

파란 하늘 새털구름을 머리에 이고 해맑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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