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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Jan 18. 2022

남편의 눈

부부란 한 배에 탄 인연

#남편 #부부란 한 배의 인연 #이심전심 #삶의 한가운데 #정년퇴직


정년퇴직을 하고 반년 넘게 별다른 활동 없이 집에서 지내던 남편. 

답답했는지 모처럼의 시내 나들이에 따라나선다.

생일을 맞은  딸과 오랜만에 이름난 북촌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 하자고 계획한 일이었다.


집을 나서자마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친다. 

집안에서는 이렇게 칼바람이 몰아치는 줄 몰랐다.

계획을 바꿔 가까운 곳으로 차를 타고 갈까 했더니 

모처럼 찬 겨울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며 머릿속이 시원하다고 하는

남편 말에 그냥 지하철을 타기로 한다.

"우리 나이에는 모자를 써야 한대요." 하는 내 얘기에 늘 "괜찮아."로 손사래를 치던 남편은 

패딩 모자를 푹 뒤집어쓴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머릿속이 시원하다며 길게 버틸 수 있는 나이가 이미 지났다.


안국역에서 덕성여중고를 양쪽에 두고 정독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옛길. 

좁은 화단을 안고 시작되는 돌담길은 

봄, 여름이면 팬지 같은 작고 예쁜 꽃들이 심어져서 

옛정취와 함께 도심에서의 여유를 맛볼 수 있는 정겨운 길이다.

또 가을 녘이면 가로수 단풍이 아름다워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힐링을 선물하는 곳.

돌담길이 끝나면 옛 건물을 개조한 각양각색의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손님을 기다린다.

하지만 오늘은 매서운 겨울바람 탓인지 

드문드문 두꺼운 패딩점퍼에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갈 뿐

평소와는 달리 거리가 을씨년스럽다.

모처럼 나들이라고 한껏 모양을 낸 딸아이는 뺨을 때리는 찬 바람에 눈물을 찔끔거린다.


돌담길이 거의 끝나가는 위치에 오래된 한옥을 보수해 레스토랑으로 만든 파스타집.

오래된 한옥에 이태리 파스타집이라...

전혀 다른 두 전통이 희한하게도 잘 어울리는 곳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고, 

작은 마당에서 커피를 마신다.

사방이 옛 격자 문의 방으로 둘러싸인 작은 중정에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고 

한편엔 작은 화단이 꾸며져 있어 

냉동고 같은 대문 밖과는 다르게 예쁜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낡고 허름한 한옥이지만 나름 옛정취가 느껴져 짙은 커피 향에 아스라한 감상이 더해진다.


곳곳에서 묻어나는 옛 추억에 젖으며 커피를 마시다가 

맞은편에 앉은 남편을 향해 카메라를 연다.

벌써 오래전 사과나무 밑에서 찍은, 여러 해가 지나도 그대로인 

그의 프로필 사진에 생각이 미친 때문이기도 했고,

모처럼 그럴듯한 배경을 담고 싶기도 했다.  

남편은 카메라가 자신을 향하면 고개를 외면하며 손사래를 치던 여느 때와 달리 

자세를 바로잡고 조용히 시선을 맞춘다.

나는 남편 주위의 배경을 살피며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남편의 얼굴에 초점이 맞은 순간 나는 잠시 멈칫했다. 

집에서 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다고 느끼는 순간 마주친 그의 눈.

그 눈은 아주 깊고 슬픈 눈이었다.

긴 세월 함께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주 깊고 푸른 호수 같이 슬픈 눈.

그것은 그의 마음 깊은 심연에서 솟아나는 원초적 슬픔인 듯했다.

그렇게 슬프고 투명한 수정 같은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내 가슴 깊이 얼음 바늘처럼 들어와 박혔다.


정년퇴직 후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분주했던 남편.

삶이 계획대로 잘 풀려 그럭저럭 만족하는 사람도, 

그와 반대로 늘 허둥대고 살았어도 부족하고 모자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모든 일을 정리하고 삶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 오면 여러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

퇴직 후 돌아본 삶과 아직 적지 않게 남은 생에 아무런 후회와 근심 없이 흡족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고 싶은 일, 뜻하는 일이 늘 머릿속에 가득한 남편은 

퇴직 후 현실과의 괴리감에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의 고민의 날들에 더해 내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생각들에 휘둘려 나 자신도 힘들었던 시간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감정들을 남편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속으로 원망을 하면서도 

나 스스로는 남편을 이해하고, 그의 고민을 함께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나는 남편의 눈 속 깊은 슬픔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고민의 깊이를 전혀 알지 못했었음을 깨닫는다.

찬 겨울바람처럼 가슴을 시리게 하는 그 푸르고 슬픈 눈빛. 

말없이 전달되는 그 깊은 고독감.


부부란 한 배에 탄 인연이라고 말한다.

그 배 안에 마주 앉아 많은 풍랑을 만나고 어둠을 헤쳐왔다. 

맑고 잔잔한 날에는 평온한 마음으로 따스한 햇빛을 받았고,

파도가 심한 날에는 서로 부딪치며 상처를 입기도 했었다. 

뒤돌아보면 그저 살아온 기억만 남아 있을 뿐 배가 지나온 궤적은 보이지 않는다.

삶이란 게 그렇게  강물에 배 흘러가듯 흐르는 것이라면  

난파 안 하고, 좌초 안 하고 이만큼 흘러온 것만으로도 지나온 삶의 의미는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흘러야 하는 시간이 많이 남았음에, 해야 할 일이 머릿속 가득함에 

그 무게에 눌려 늘 힘겨워하는 남편.

한 배에 탄 인연이라 해도 각자 갖고 있는 엉킨 실타래는 공유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스스로 극복하고, 풀어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두고 있는 숙업의 매듭.


매서운 추위에 동네 한 바퀴는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느닷없이 불쑥 눈물이 솟는다.

그의 눈을 통해 전이된 슬픔이 내 안에서 응축되어 분출된다. 

남편은 알지 못하고 책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다.

나는 미동도 없이 앉아 흐르는 눈물에  짙은 슬픔을 다 녹여낸다.

집에 도착한 남편은 언제 그런 눈빛을 보였냐는 듯 졸린 눈으로 소파에 길게 눕는다.

무엇인지 매듭 하나가 풀린 듯 보였다.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한 번도 깊이 들여다본 적 없었던 남편의 짙은 슬픔과 고독의 눈.

그리고...

그 고독하고 슬픈 눈이 바로 내 눈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부부란 한배에 타고 흘러가는 깊은 인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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