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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Jan 14. 2022

팔공산 나목(裸木)

#겨울산#겨울나무#벚나무#나무의 에너지#하나의 삶


벚나무 나목은 다른 가로수보다 아주 검다. 

새까맣다 할 만큼 검은색이다.

플라타너스 나목은 희고 얇은 옷을 입은 것 같고 버드나무 나목은 회갈색 겨울옷을 입은 듯하다.

모든 가로수들이 잎새 다 떨어 버리고 검고, 희고, 갈색이고 회색빛이기도 한 

제각각의 속살을 보이고 있는 계절.

그중에서도 팔공산 둘레를 휘감아 심어져 있는 벚나무들은 그 속살이 유난히도 새까맣게 짙다.

현란했던 단풍도 다 떨어진 지 오래인 스산한 초겨울의 산길은 

회색빛 하늘만큼 분위기도 적막하고

그 길을 걷는 마음 또한 물결 없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활짝 핀 연분홍의 벚꽃이 봄바람에 꽃잎을 날리면 꿈 속인 듯 환상적이고, 

그 꽃비만큼 가을의 단풍이 황홀한 팔공산 둘레길.

벚꽃이 만개하는 봄에는 나들이객의 옷색깔이 또한 인상파 그림 같은 곳.

푸른 여름이 지나면 바로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벚나무 단풍, 

그 가을색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봄 벚꽃보다 가을 벚나무 단풍에 더 마음이 끌린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단풍 시든 나뭇잎은 떨어지고 가지 끝마다 이파리 몇 개씩만 남아있을 때,

그 벚나무의 모습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고 가슴이 시리다.

완전히 옷을 벗기 전, 

저물어가는 시간의 슬픔이 묻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 가을 끝자락의 벚나무 단풍을 

나는 가슴 저리도록 사랑한다.


내가 기억하는 벚나무의 아름다움은 그게 전부였다.

봄과 가을의 화사하고 황홀한 아름다움.

그 시절이 지나면 모든 나무들이 겨울에는 휴식에 들어가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지고 

그 시간들은 반은 죽음과 같은 시간이라 생각했었다.

때문에 겨울나무들은 그저 쓸쓸하고 애잔한 감상만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참 놀랄 일이었다.

스산한 계절, 나뭇잎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벚나무 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갑자기 숨이 막히며 무엇으로 크게 얻어맞은 듯했다.

차도 사람도 없는 한적한 겨울 길,

양쪽으로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 벚나무 나목들이 새까맣게 벗은 모습으로 

일제히 손을 흔들며 반갑다는 듯 보내는 환호성.

그 소리 없는 환호성은 귀를 울리고 머리를 때리며 가슴으로 스며들어 온몸을 흔들어 놓았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고구려 기마부대 전사들 같고, 고대 스파르타의 검투사들 같기도 하며, 

강한 훈련으로 단련된 흑인 용병들 같기도 했다.

양쪽으로 도열한 검은 나목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에너지는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큰 산의 기운을 온몸에 담아 뿜어내며 소리치는 듯한 느낌. 

아니,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모아 뿜어내는 것 같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듯하다.

그 순간 그들의 강한 에너지장과 공명하며  나는 벚나무 나목들과 하나가 되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전율이 일었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에 의해서 심어졌을 벚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뿌리를 깊이 내리고 이제 그 뿌리는 서로 얽히고 또 얽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산 전체를 휘감고 있으리라. 

그들은 그렇게 산과 하나가 되고

거대한 산의 정기와 그 산을 감싼 허공의 에너지를 흡입하여 

아름다운 꽃과 황홀한 단풍을 피워 내면서

아주 오랜동안 변함없이 참으로 엄청난 삶을 이어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떨궈낸 이 겨울에 

그 나목들은 본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그것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강한 에너지의 역동성을 가진 나목의 집합이었다.

추운 겨울을 맞는 쓸쓸하고 스산한 죽음의 모습이 아닌,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

그들은 그렇게  겨울에도 쉬지 않고 새로운 봄을 위해, 다시 시작될 삶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의  에너지 공장을 풀가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겨울 나목들에게서 삶의 역동성을 느끼며, 

그들과 더불어 또 한 생을 살고 있음을 깊이 체험한다.

그리고 그들과 하나로 이 우주에 존재하고 같은  에너지장 속에 더불어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검은 나목들이 군인처럼 빽빽이 도열한 초겨울 팔공산 둘레길에서 

나는 나무와 산과 우주와 하나가 되는 시간을 만났다.

그것은 자연이 내게 준 아주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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