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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Feb 01. 2022

할머니, 내 마음의 고향

#할머니#옛 기억#할머니는 사랑#기억의 그림책


할머니는 1896년에 태어나셔서 1977년 내가 여고 졸업반이던 해에 돌아가셨다.

구한말에 태어나셔서 일제강점기, 해방과 독립,  그리고 전쟁, 재건, 

참으로 험난한 한 시대를 살아오신 분이시다.

한 여자로서의 할머니의 삶도 또한 평탄치 않았다고 기억한다.

내가 너무 어렸던 탓에 할머니께서 해주셨던 이런저런 할머니의 개인 역사가 이해도 안 됐었고, 

기억에서도 사라졌지만, 일찍 혼자되셔서 아들 하나 키우고 사셨으니 

넉넉지 않은 살림에 고단한 삶을 사신 것은 사실이리라.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젊은 나이에 편찮으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박대하셨던 

큰할아버지, 큰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해주셨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할머니는 아직 당신의 아픔을 이해도 못할 어린 손녀딸을 무릎에 누이시고 

당신의 한 많은 삶의 기억을 마치 옛날 얘기하시듯 나직나직 읊조리셨다.

나는 그 얘기를 꼭 콩쥐를 구박하던 팥쥐 엄마 얘기 듣는 것처럼 흥미 있게 듣곤 했다.


할머니는 외아들인 나의 아버지를 전쟁에 내보내시고 홀몸으로 친정으로 돌아가서

날마다 장독대에 정한수 떠놓고 정성을 올리시던 얘기도 해주셨다.

글을 모르시던 할머니는 이웃에게 구술하여 대필한 편지를 아버지께 보내시곤 했었는데

군복 윗주머니에 넣어져 있던 그 편지가 총탄을 막아 아버지를 살리셨다는 기적 같은 얘기도 있었다.

할머니는 당신이 겪은 고생과 한 많은 사연들을 긴 세월 동안 녹여오셔서인지 

참 담담하게 남의 얘기하듯 말씀하셨었다.

어쩌면 내가 그 한 많은 사연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여서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할머니는 그 외에도 많은 신기한 얘기들을 해주셨는데 

그 많은 얘기들을 어디서 들으신 건지, 또 체험하신 건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 무릎베개를 하고 자장가 삼아 듣던 따듯한 음성의 그 얘기들이 

지금은 기억에 많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어느 햇빛 밝은 날 마당에 의자를 내놓고 화단 앞에 조용히 앉으신 할머니.

할머니는 늘 회색빛 무명치마에 흰 무명 저고리를 입으셨다. 

여름엔 삼베 저고리를, 겨울엔 회색빛 털 스웨를 덧입으셨던 할머니.

그날도 회색 무명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으시고 잿빛 머리를 곱게 빗어 쪽 지어 은비녀를 꽂으셨다.

굵게 패인 이마와 볼의 주름, 거무스름하게 검버섯이 핀 얼굴로 

무릎 위에 마른 손을 가만히 모으고 앉아계시던 할머니.

온화한 미소를 띠신 얼굴. 

눈꼬리가 조금 내려앉은 따듯하고 자애로운 할머니의 눈, 그 작은 체구에서 풍기는 평온함. 

고생 끝에 얻은 생의 평화로움을 가득 담은 표정, 그것이 작은 행복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였어도

할머니에게는 아주 큰 생의 축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즐겨 찍으시던 아버지께서 카메라에 담으신 그날의 할머니 사진은 

훗날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주 또렷이 기억하는 유일한 할머니 모습이 되었다.


할머니는 연년생으로 동생을 본 나를 갓난아기 적부터 도맡아 키우셨다.

어찌 보면 늦게 얻은 첫 손녀인 나는 할머니 인생 전체를 통틀어 제일 귀한 존재였던 것 같다.

물론 아버지가 할머니께는 제일 귀한 사람이 틀림없지만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은 다음에는

그 사랑이 손녀인 나한테로 증폭되어 이전되었던 것 같다.

그처럼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을 

할머니는 앞마당 꽃밭 위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내게 듬뿍 부어주셨다.


할머니는 내 유년과 청년으로 넘어가기까지의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 삶의 큰 지주였다.

나는 할머니와 꽃밭을 만들었고, 할머니와 나물을  캤으며, 할머니와 댓돌에 앉아 따듯한 햇살을 즐겼고,

할머니 가슴에 손을 넣고 잠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할머니를 먼저 찾았었고, 할머니와 엄마 간에 고부 갈등이 있을 때는 

매번 할머니의 마음을 먼저 챙겼었다.

어찌 보면 엄마와 나 사이에 할머니가 너무 크게 들어 있어서 

어린 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할머니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늘 내 곁에 계셨고, 

기쁘고 슬픈 모든 일에 항상 내 마음을 다독이시며 지극 정성으로 나를 돌보셨다.

그런 할머니가 안 계신 삶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나는 할머니를 깊이 사랑했었다.


이제 할머니가 첫 손녀인 나를 품에 안으셨던 나이가 된 나는 

기억의 고향을 더듬어 잊었던 조각들을 찾아보려 한다.

더 늦기 전에, 아직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을 때, 오래전 미뤘던 일기를 쓰듯이, 

마음속 그림퍼즐의 조각을 맞추듯이.

돌이켜보면 나의 생에서 가장 안온하고 평화로웠던 시절, 

그 그림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할머니.

그것은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 내 마음의 고향, 그 본체라 할 수도 있으리라.

더 시간이 가기 전에 그 기억의 작은 그림들을 하나씩 모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옛 마음의 고향을 담은 작은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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