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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Feb 01. 2022

할머니와 오이지

잊을 수 없는 여름의 맛

#잊을 수 없는 맛#할머니#오이지#여름날


더운 여름날 오후였다.

흰 블라우스에 감색 플레어스커트의 교복을 입은 중학생의 나는 

그날 무엇 때문인지 이른 귀가를 했었다.

옅은 푸른색으로 페인트칠이 된 대문을 들어서니 대청마루에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마주 보이는 창밖으로는 뒷동산 마당바위가 하얀 햇살을 반사하며 평평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더 구부리시고 무언가를 잡숫고 계셨다.

"할머니~~"

할머니를 부르며 다가가 보니 할머니께서는 상도 없이 마룻바닥에 작은 쟁반을 놓고

늦은 점심인지 새참인지 식사를 하고 계셨다.

아무런 다른 반찬 없이 찬물에 만 흰밥에, 쭉쭉 찢어 물에 담근 오이지 그리고 빨간 고추장.

물 말은 흰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시고 

오이지 하나 건져 고추장 찍어 베어 무시던 새참.

내가 곁에 다가앉아 "아!"하고 입을 크게 벌리자 

할머니는 드시던 것과 똑같이 한 숟가락 흰밥을 입에 넣어주시고 

오이지를 고추장에 찍어 잇달아 입에 넣어 주신다.

아삭 베어 무니 입안에 퍼지는 짭짜름한 오이지 물. 짭짜름한 오이지 물이 꿀처럼 달게 넘어간다.

그렇게 맛있는 한 숟가락이 또 있을까.

오이지가 여름철 대표음식임에는 틀림없지만 

아무런 다른 찬 없이 하나만으로 훌륭한 음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그날 그 할머니의 오이지는 그 어떤 반찬보다 꿀맛이었다.


그 하얀 여름 낮에 엄마도, 동생들도 다 어디 갔는지 괴괴한 집안에 

할머니 혼자 마루에 앉아 허리를 구부리고 드시던 찬물에 말은 흰밥, 고추장 찍은 오이지. 

조금 처량한 듯한 느낌은 지금의 나이 먹은 내 감상에서 첨가된 것일 뿐 

그때는 전혀 그런 느낌 없이 입에 넣은 오이지만 꿀맛 같았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전혀 알지 못할 그 맛.

나 자신도 그날 이후로 그렇게 먹은 기억이 없지만 그날의 오이지 맛은 잊을 수가 없다.

햇빛은 하얗게 부서지고 마당에선 열기가 오르지만, 

어둑하고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홀로 새참을 드시던 할머니.

그날 할머니의 찬물에 말은 흰밥과 오이지는 

그 여름을 식혀주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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