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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Feb 19. 2022

할머니의 호주머니

#맛 주머니 #요술주머니#사랑 주머니#추억 주머니


할머니는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면 늘 회색 털스웨터를 걸쳐 입으셨다.

할머니께서 가지신 겨울옷이 몇 벌 안 되기도 했지만 양쪽으로 주머니가 달린 오래된 그 스웨터가 

당신에게는 아주 편하셨던 것 같다.

한겨울에는 털배자를, 배자라는 단어가 요즘은 낯설어 조끼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지만, 입으시고 

그 위에 덧입으시던 스웨터.

그 회색 털스웨터가 내 기억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 스웨터 주머니 속에서 

몽글몽글 솟아나던 따듯하고 행복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는 치마 속 고쟁이에 달린 주머니에는 용돈을 조금씩 모으셨고,

겉옷에 달린 주머니에는 손주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는 작은 보물들을 넣어두셨다.

동생들과 나는 무언가 괜히 심심하고 입이 궁금할 때는 

할머니 주머니에 손을 쓱 집어넣고 무엇이 있는지 휘저어 보곤 했었다.


어느 날에는 은행이 몇 알 들어 있었고, 또 어느 날에는 제사 지내고 넣어두신 약과가 

얇은 기름종이에 쌓여 있다가 나오기도 했었다.

또 어린 손주들이 구멍가게에서 사 온 알사탕이 가만히 들어 있다가 손주들 손에 되돌려지기도 했으며,

가운데 구멍이 숭숭 뚫린 엿가락 토막이 흰 종이에 쌓여 나오기도 했다. 

또 어느 날에는 1원짜리,5원짜리 동전도 들어 있어서 그 동전을 받는 날에는 동네 구멍가게로 달음질을 쳐서

굵고 흰 설탕이 붙어 있는 왕사탕을 사 오기도 했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아주 작은 행복이 할머니 주머니 속에서 늘 마술처럼 솟아 나왔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할머니 주머니 속에서 여러 날 머물러 꾸득꾸득해진 밤톨이었다.

할머니는 늦가을에 생밤 몇 알을 스웨터 주머니에 넣고 계시다가 

그 밤이 말랑말랑 젤리처럼 말랐을 때 작은 칼로 껍질을 까서 입에 넣어 주셨다.

겨울바람이 찬 날, 할머니는 햇살 따듯한 앞마당 댓돌에 어린 나를 옆에 앉히시고

주머니에서 쭈글쭈글 마른 밤톨을 몇 개 꺼내서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셨다.

겉껍질은 쉽게 벗겨지지만 말라서 속살에 달라붙은 속껍질은 쉽게 벗겨지지가 않는다.  

할머니는 오래도록 천천히 그 속껍질을 작은 칼로 벗겨내신다.

그 작업은 꼭 마른 밤 한 톨에 묻어 있는 긴 시간을 애기손톱만큼씩 벗겨내는 진중한 작업인 듯했다.

그 짧지만 긴 듯한 시간을 나는 할머니 옆에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가만히 지켜본다.


드디어 마른 밤이 속살을 다 드러냈을 때 내 작은 입은 아기새처럼 자동으로 벌어지고,

할머니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노르스름한 밤알을 입에 넣어 주신다. 

그 작은 밤톨은 깨무는 순간 내 가슴 가득 행복과 사랑을 차오르게 했다.

나는 할머니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만족의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나는 할머니와 추운 겨울 어느 날의 시간을 밤 향기로 가득 채웠다.

할머니께서 만들어주신 간식에 대한 추억이 아주 많지만

지금도 내 기억은 그날 입안에 가득했던 마른 밤의 달콤하고 고소한 맛과, 감촉 

그리고 코끝에 맴도는 밤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긴 시간 할머니의 호주머니 속에서 숙성된 밤톨 몇 알.

쭈글쭈글 주름 잡힌 할머니의 손과 그 손에서 햇빛을 반사하던 은빛 작은 칼,

할머니의 손놀림에 따라 조금씩 떨어지던 털이 보숭보숭한 밤의 속껍질이 

오늘 내 기억의 마당 한 귀퉁이에 소복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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