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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Jun 06. 2022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선물

#아버지의 선물 #추억#시집#서정시들#묻힌 기억


아주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추억을 하나 빼들었다.

빨간 정사각형의 하드커버 표지에 금박으로

"언제까지나- 영원한 한국의 명시"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 유명 순수 서정시를 모아 수록한 시집.

모서리가 닳아서 누런 속이 다 드러난, 조금은 촌스러운 표지 디자인과 서체는

보기만 해도 책의 나이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가만히 제일 뒷 장을 열어 본다.

"1973,ㅇ, ㅇㅇ 아버지가".

중학교에 입학해 어린아이 티를 벗으며 조금씩 문학소녀의 느낌을 풍기는 큰딸에게

어느 날 선물로 주신 시집.

아버지는 당신 첫 자식의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어떤 마음이셨을까...

사춘기 감성의 나는 시집에 실려있던 서정시들을 책이 닳고 닳을 때까지,

다 외워서 줄줄 읊을 수 있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소월의 '진달래꽃'. 노천명의 '사슴', "김춘수의 '꽃',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박목월의 '윤사월',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소월의 '초혼'은 또 얼마나 가슴을 저리게 했었던가.

그 절절한 감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외우고 또 읊조리면서 눈물짓기도 했었지.


제목을 다 열거하기에도 부족한 아름다운 시들이 200쪽 넘게 실려 있던

이 시집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박두진 시인의 '도봉'이 실려 있었다.

시인의 말년작인 지는 모르지만 삶의 뒤안길에서 쓴 듯한 느낌의 시.

어린 나는 삶이 무엇인지 미처 알지도 못할 나이이면서도

그 시에서 삶의 황혼기에 고즈넉한 산길에서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고요한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시인의 모습을 마주했었다.


"산새도 날라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은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땅거미 내려앉은 산자락의 어스름 풍경과 함께

지금도 이 시는 머릿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아버지는 인물이 좋으시고 아주 감성적인 분이셨다.

그 시절의 가장들이 대부분 가부장적인 권위를 누리셨듯이

아버지도 늘 우리에겐 큰 바위처럼 무거운 분이셨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느라 애쓰시면서도

당신이 일찍 아버지를 여읜 탓에 누리지 못한 부정을

자식들에게는 듬뿍 베풀려 노력을 많이 하셨었다.

그것이 때로는 자식들을 더 힘들게 했어도

아버지는 늘 끊임없는 관심을 넘치도록 자식들에게 쏟아 부으셨었다.

쉰 중반에 정년퇴직을 하시고 그때부터 시작된 여러 병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의 긴 시간을 당신 자신과 가족을 힘들게 하셨던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늘 아픔과 회한을 동반한 잿빛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빼어 든 빨간 커버의 시집 한 권이

잿빛 하늘 한구석을 열리게 하며 따스한 햇살을 피운다.


내게 그 빨간 시집을 선물하셨던 때 아버지의 나이가 사십이 갓 넘으셨을 즈음이니

그 시절 아버지는 얼마나 젊고 또 심신이 활기찬 시기였던가.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퇴근해 오시던 아버지의 손에는 센베이가 한 봉지씩 들려져 있었고,

명절이면 직장과 가까왔던 명동 뒷골목 화교 상점에서 월병을 한 상자씩 사들고 오셨었다.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미군 씨레이션도 가끔씩 사 오셔서 우리에게 신기한 간식거리가 되곤 했었다.

또 차도 없던 그 시절에 주말이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일영이며 장흥이며

서울 근교 나들이를 자주 다니셨었다.

덕분에 우리 삼 남매에게 교외선 열차는 아주 익숙했고 지금도 서울 근교 옛 풍경은 기억 속에 환하다.

그런 아버지께는 젊음과, 건강과, 미래가 있었고,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행복했었고,

자식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힘든 삶의 무게를 감당해 오셨을 것이다.


이제 이 나이가 되니 지나가고 또 진행 중인 모든 삶이 잿빛도, 분홍빛도 아니며,

나름대로 최선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각자의 그릇만큼 채우고, 배우고 또 능력만큼 그림 그리고 가는 삶.                                

그렇게 삶이란 것은 그저 '흐르는 강물'에 젖어 물과 하나로 흘러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가슴속 책꽂이 한편에 빨간 하드커버의 "언제까지나"라는 시집이

한 권씩 꽂혀 있음을 안다.

어느 날 문득 그 시집을 뽑아 들고 책장을 넘기면

잊었던 추억의 명시들이 하나씩 옛 기억의 향기를 뿜으며

미소 띤 얼굴로 너울너울 춤추며 나올 것이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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