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상실, 기억의 복원.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었을 때에야 비로서
사라진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내가 모든 감각을 잃은 이후였다.
후회했던 순간들을 되돌리기 위해, 그가 반드시 잃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1 (2300자)
바람은 더 이상 차갑거나 따스하지 않았다.
뺨을 어루만지는 것도 아니고, 단지 지나가는 기류일 뿐이었다.
무한한 초원의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은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주변은 끝없이 펼쳐져 빈 공간처럼 느껴졌지만, 이 넓은 곳 몇 걸음 거리에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나는 그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맨발로 풀밭을 밟자, 어릴 적 엄마와 함께 공원에서 소풍을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풀잎의 생생한 감촉과 약간의 가려움이 발끝을 간질였던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풀잎을 스치는 발끝은 무감각했고, 땅의 단단함도 그저 시각적 정보일 뿐, 어떤 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무는 사과나무였다.
붉은 사과들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나무의 짙은 그림자는 마치 그 길을 가로막으려는 손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그저 앞으로 걸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게도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사과 하나를 따서 손에 들었다. 껍질은 매끄럽고 차가웠다.
목의 갈증은 점점 더 강렬해졌고, 보기만 해도 과즙과 단맛이 떠올라 침이 고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먹고 싶지는 않았다.
정체도 모를 과일을 함부로 손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사과에서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촉이 그 증거였다. 그럴수록 긴장감은 점점 더 고조되었다.
그래, 상식적으로는 더욱더 먹어서는 안 될 사과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점차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나는 어느새 사과를 바라보며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움직이는 것은 풀잎과 나뭇잎뿐이었다. 잔잔한 파도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내 시야에 어른거렸다.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을 때,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사과를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단맛을 기대했던 혀가 받아들인 것은 시큼하고 쓴 부패의 맛이었다. 썩은 냄새가 퍼져나갔고, 손끝으로는 사과의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그리고 그 차가움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사과를 내던지려는 순간, 머릿속을 강렬하게 관통하는 기억들이 몰아쳤다.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듯,
잊고 있던 장면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겁이 더럭 났다.
마치 불편한 진실을 알아버린 듯, 식은땀이 흐르지도 않았는데도 나는 이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하지만 왜 걷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알았다.
아니, 사실 기억해 낸 것은 아니다.
다만 깨달아버린 것 같다.
이 길이 내가 떠나온 모든 순간들로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을.
기억 속에서 먼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했던 공원의 풍경이었다. 푸른 잔디 위로 펼쳐진 새빨간 사과들, 그리고 엄마가 건네주던 따스한 손길.
하지만 그 따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싸늘한 고요로 바뀌며 기억은 천천히 희미해졌다. 남아 있는 것은 결국 나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간 사람들의 희미한 얼굴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내 손에 들린 사과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유리처럼 깨진 파편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지만,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나는 사과 파편을 내려다보며 내가 먹었던 사과의 의미를 점차 알게 되었다.
우선,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이 곳은 단순히 내가 알던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여 있는, 드넓은 초원은 마치 비상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바다처럼 느껴졌다.
자유로워야 할 이 풍경은 나를 심해 깊숙이 끌어들이는 것만 같았다.
아마 지금 내가 보는 이 모든 것도 현실이 아니겠지만, 마치 누군가가 잘 설계해 놓은 듯한... 한편으로는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길은 또다시 새로운 풍경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샌가 풀잎들이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길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기다릴 뿐이니,
운명이 바라는 대로 가자.
바람이 내 등을 밀어내듯, 운명의 바람이 이끄는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걸음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하지만 빨리 뛰어갈 수는 없었다.
걸음을 하나하나 옮길 때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기억들이 카세트테이프가 역재생되는 듯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이 세계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되살아난 기억의 조각들을 곱씹어 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채
나는 지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