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삶"이라는 단어를 쓰지 마.

큰 질문을 경계해라. 쉽게 논할 수 없는 진지함.

by 잉크 뭉치




영원한 건 없다.

영원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죽어서 부활을 할 수가 없다.



참새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시냇물이 돌 사이를 감싸며 흐르듯,

나무가 계절을 따라 잎을 떨구듯,

세상은 순환한다.



모든 것이 태어나고, 자라고, 결국 소멸한다.

그 안에서 사람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오늘도 돈을 번다.



돈은 삶의 수단이 되어야 하지만,

어느새 목적이 되어버렸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도,

그 꿈의 끝에는 늘 돈이 걸려 있다.

우리는 돈에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그 순응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잃어간다.



모든 것이 낡고 무너진다.



성경보다 짧은 역사의 자본주의가

진리인 양 떠도는 지금,

영원을 꿈꾸게 하며 끝없는 욕망을 강요한다.

그러나 그 욕망조차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진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진리를 논하고,

끝내 그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보이는 모든 것이 진리라고 믿고 살아라.

싫어도 그럴 수밖에 없다.



물질 속에 담긴 뜻은

유물론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입을 모은 이들의 입은 가벼워진다.

작은 개미가 우주의 원리를 논하듯

살아라.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라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면,

성경을 찢어버려라.



우리는 그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나약하다.

그 나약함이 우리의 삶을 선택하게 만든다.



모래성처럼, 바다에 휩쓸려 사라지는 나약한 존재가 생물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보기 전까지는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면.



우리는 그 너머를 볼 수 없다. 부활을 의심한 도마처럼,

의심만 하는 자가 바보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생각만 하며 흘러가는 것이 인생인 것처럼.

의심만 하지 말고, 그 너머를 보기 위해 움직여라.




이어령 교수의 글귀가 떠오른다.



"큰 질문을 경계하라."

큰 주제로 말하는 것에 현혹되지 마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진실이 있다."

크게 보면 모든 글의 주제는 하나다.



사람이 살고, 죽는 이야기.

그러한 만장일치적인 말에 발전도 의미도 없다.

죽은 말에 불과하다.



그러니, 함부로 "삶"이라는 단어를 쓰지 마라.

쉽게 다룰 수 있는 주제이기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나조차도 모순적으로 쉽게 외치고 있다.

그만큼 그것은 어렵다.


그러나,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면 결국 "삶"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글 속의 삶 안에는 온전한 내가 없다.



처음부터 글쓰기에 내 것은 없다.

전부 다 받은 선물이지.

그 선물을 도둑질하고 싶지는 않다.

나다운 글 한 문장을 위해 글을 쓰는 것 같다.



큰 국어사전 속 찍혀 있는 작은 온점.

나는 그 온점 하나를 위해,

살아가는 인문학의 점 하나를 찍기 위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