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나를 데려온 자리

쓰다 보니 도착해 있던 곳

by 한동수

처음부터

어디에 도착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쓰고 싶었고,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글을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작가가 되겠다는 말도,

목표도,

선명한 방향도 없었다.

다만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문장으로 풀어놓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썼다.

잘 쓰겠다는 생각보다

살아남겠다는 마음으로.


돌아보면

글은 늘 나를 앞질러 가 있었다.

나는 따라 쓰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글이 나를

조금 다른 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그 자리는

대단한 곳이 아니었다.

완성이나 확신 같은 것도 없었다.

다만

예전보다 덜 나를 미워하는 자리,

조금은 나를 믿어도 되겠다는 자리였다.


글을 쓰며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

속도를 잃었고,

확신을 잃었고,

비교하지 않으려던 마음도

수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들을 얻었다.

멈춰도 괜찮다는 감각,

흔들려도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들.


글은 나를

눈부신 무대로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

데려왔다.


이제 나는 안다.

글이 나를 데려온 자리는

목적지가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여기서는

조급하지 않아도 되고,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오늘의 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여전히

잘 쓰고 싶고,

더 나아가고 싶고,

가끔은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심한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은 하나다.

이제는

글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굳이 재촉하지 않는다.


오늘의 문장을 쓰면

그걸로 충분하다.


글이 나를 데려온 자리는

완성된 사람이 되는 곳이 아니라,

계속 쓰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자리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리가

생각보다

아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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