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밀어내지 않고 책을 곁에 두었다
우울을 이겨냈다고 말하기엔
조금 조심스러워진다.
어느 날 갑자기 나아진 것도 아니고,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우울했던 날들 속에서
책을 곁에 두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
우울할 때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버거웠다.
일어나야 하고,
움직여야 하고,
괜찮아져야 한다는 말들.
그런데 책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잘 이해하지 않아도 됐고,
집중하지 않아도 됐고,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됐다.
그저
페이지를 넘길 수만 있으면 됐다.
책은
나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어떤 문장은
유난히 오래 남았고,
어떤 문장은
그냥 흘려보냈다.
중요한 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책은 나에게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마음도 있다”라고
조용히 보여주었다.
그게 참 좋았다.
우울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옆으로 비켜났다
독서를 하면서
우울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우울이 내 전부는 아니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내 마음이
한 가지 색으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조금 다른 생각이 들어오고,
조금 다른 온도가 생겼다.
그 정도면
그날은 충분했다.
가장 큰 변화는
‘시간을 견뎌낸 방식’이었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하루가
실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읽은 날은
다르게 기록되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못 했지만
그래도 몇 페이지는 넘겼다.”
그 문장 하나로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독서는
나를 일으켜 세운 게 아니라
눕혀두었다
우울한 사람에게
항상 용기가 필요한 건 아니다.
때로는
안전하게 누워 있을 자리가
더 필요하다.
책은
그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아도,
말없이 함께 있어 주는 방식으로.
지금도
책은 내 옆에 있다
여전히 우울한 날은 찾아온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책을 연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를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서.
우울을 이겨냈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씩 살아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에게
그 ‘조금씩’을 가능하게 해준 건
책이었다.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