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것

산티아고 순례길 Day15

by 재인

여전히 너무 춥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피부를 넘어서 뼛속까지 파고 들었고, 바람은 숨 쉴 때마다 다리를 얼려버릴 것 처럼 차가웠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내 몸을 조여오는 바람과 싸우듯 걷다 보니, 그 싸늘함 속에서 갑자기 외로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고요하고 끝없는 평원 위에서 나란 존재는 너무나 작게 느껴졌고, 걸을수록 그 외로움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이렇게 추울바엔 차라리 산이라도 올라가 열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일종의 반항처럼 일었다. 그래서 나는 멀리서 눈에 들어오던 낮고 완만한 능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언덕인지 산인지 모를 그 부드러운 경사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마을은 어느새 멀어졌고 길은 마치 층을 밟듯 천천히 상승했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할 무렵, 고개를 들자 시야가 환히 트였다. 그 순간 단숨에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그 풍경 앞에서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분홍빛 하늘이 수평선을 따라 천천히 퍼지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말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이 조용히 누워있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들판이 있었고, 마치 누군가 손으로 곧게 그어놓은 듯한 길이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아무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나는 지구위를 걷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게 지구의 풍경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듯한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게 실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몽환적이고 조용한 세계. 나는 그저 멍하니 서서 한 바퀴를 조용히 돌았다.


하지만 풍경이 멋지다고 다리의 피로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몇십 킬로미터를 걸어 도착한 곳은 ‘프로미스타’라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메뉴판을 보는데 ‘장작불에 구운 뭐시기‘라는 13유료짜리 메뉴가 있었다. 한화로 16,000원이 넘는 가격이라 군고구마 같은 건가? 기대하며 주문했는데, 나와버린 건 구운 야채 샐러드였다. 충격이었다. 같이 걷던 분이 시킨 스테이크가 훨씬 싸고 맛있어 보였고, 나는 왜 이렇게 비싸게 샐러드를 먹고 있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샐러드를 만원 넘게 주고 판다고? 화도 나고 배도 안부르고.. 하지만 식전빵이 또 너무 맛있어서 울다가 웃다가 점심을 해결했다. 뭐, 그럴 때도 있는거지

오늘은 35km를 걸었다 그 중 7km는 오로지 같은 풍경의 직선길 같았다. 마을이 간간이 나왔지만 그마저도 다 비슷하게 느껴졌다. 다 온 줄 알고 마음을 놓았는데, 알고보니 마을 하나가 더 남아 있었을 땐 멘탈이 잠깐 흔들리기도 했다. 드디어 도착한 알베르게는, 커다란 마당에서 당나귀와 오리들을 키우는 시골민박 같은 곳이었다. 알록달록한 입구를 지나 풀밭과 작은 적원을 지나니, 마당에서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히피 감성의 자유로운 사장님. 마치 지리산 어딘가에서 젊은 여성이 민박을 운영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오늘 마을은 집이 다 합쳐봐야 열채도 안되는 진짜 작은 마을이었다. 그래도 씻고 성당에 들렀다. 이런 작은 마을이니 당연히 문이 닫혀 있겠지? 생각하며 문을 열었는데, 의외로 문이 벌컥 열렸다. 마침 성당안에서는 봉사자와 이탈리아 순례자가 이야기를 나누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됐다. 봉사자는 성당의 구조와 역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셨다. 성당 천장이 나무로 되어있었는데, 이는 이슬람식 구조라고 했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예수님 위에 또 한분의 모형이 있었는데 봉사자는 “예수님 위에 올라갈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뿐이죠”라고 하시며, 그 위의 인물은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이라 설명해주셨다. 구석에는 그 모형을 조각한 사람이 500년 전에 새겨둔 싸인도 있었다. 어린이 성경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며칠 전 일기에서 ’작은 성당 들이 닫혀 있어서 궁금하다‘고 쓴 적이 있었는데, 진짜로 그게 닿았던 걸까?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다. 그 풍요로운 마음으로 알베르게로 돌아오자,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다. 마침 이곳에서는 수비리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던 스위스 순례자 ‘콜트’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큰 원형 테이블에 앉아 요리를 기다렸고, 사장님은 큰 냄비 여러개를 들고 가져와 뚜껑을 열 때 마다 직접 만든 요리들을 소개하며 식사를 했다. 그리고 기타를 들고와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셨는데, 가사 중에 “콤포스텔라”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들렸다. 아마 순례를 주제로 한 노래지 않을까?

오늘 저녁도 참 따뜻하고 화기애애했다. 미국, 이탈리아, 콜롬비아, 호주, 타이완, 일본, 스위스, 한국..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다 같은 길을 걸어왔기에 마음이 통하는 저녁이다. 내가 너무 잘 먹는 걸 본 콜트가 “재인?”하고 부르더니 손을 두번 흔들며 ”워~ 워~“라고 했다. 너무 웃겼다. 그치만 멈추진 않았다. 후식으로 요거트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콜트가 수비리에서 내가 건넨 메모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가 아직도 그걸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나도 지나온 순례자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나 역시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있다는 게 좋았다.


식사가 끝나고 사장님께 요리하시느라 힘들지 않냐고 여쭤보자, 사장님은 웃으며 말했다. “I love cooking. I love people. I love music!” 그 환한 웃음과 당당한 대답이 멋있었다. 나도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산다면 순례길에서 처럼 매일 걸으며 고단해도, 그 안에 분명한 의미가 있고 작은 기쁨들이 스며있는 그런 삶을 한국에서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직도 선명히는 모르겠지만, 여행을 하며 나를 이루는 조각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이 시간들이 결국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비춰줬으면 좋겠다. 언젠간 이 길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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