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16
어둑어둑한 아침, 조용히 알베르게 로비로 나왔다. 주방에서는 도네이션 조식으로 음식이 잔뜩 준비되어있었다. 따뜻한 빵 한 조각과 커피 한잔으로 속을 채우고, 든든한 마음으로 평원의 바람을 맞이하러 나섰다. 하지만 결국 평원의 매서운 바람에 졌다. 감기에 걸린 거 같다. 코가 꽉 막혔고, 숨 쉬는 것 조차 버거웠다. 마을을 지나 걷는데, 한 집 창문에 정말 예쁜 아기 인형이 있었다. 예뻐서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는데 파란 눈동자가 ‘깜박’하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인형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백인 여자아이였다. 진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 아이도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아이를 데리러 온 아빠와 함께 나에게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해주었다. 그 작은 인사가 아침의 피로를 다 가져가주었다.
어제 함께 저녁을 먹었던 콜트도 계속 길에서 마주쳤다. 나에게 잘 걷는다며 칭찬도 해주었다. 오늘은 17km 동안 마을도, 화장실도, 식당도 하나 없이 풍경조차 변하지 않는 직선 구간이었다. 10km쯤 걸었을 때, 돌로 만든 큰 벤치 하나가 나왔는데 뜨거운 햇볕 아래 시원한 돌 의자에 앉으니 한참을 쉬게 되었다. 17km 다 걸은 거 같다 싶었는데, 마을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지칠 무렵, 길 끝에 내리막이 보이더니 그 아래 알베르게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라스에는 이미 도착한 순례자들이 다같이 웃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 맥주? 절대 못참지!’ 얼른 체크인을 마쳐야할 것 같았다. 사장님은 마동석같았지만 눈빛은 초롱초롱 했다. 내 가방을 들어 침대까지 안내해주었다. 무뚝뚝해 보여도 순례자들에게 먼저 다가와주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 알베르게는 1층에 식당, 테라스, 수영장이 있고 2층에는 빼곡하게 침대가 들어찬 구조였다. 나는 제일 구석 침대를 배정받았다.
테라스로 내려가 스페인에서 파는 ”끌라라“라는 레몬맥주를 주문하고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켰다. 따스한 햇살과 넓게 펼쳐진 평원. 시원한 바람 그리고 텅 빈 위장을 채워주는 맥주까지. 17km의 고난을 지나 이 곳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테라스에 하나 둘 도착할 때 마다 다같이 박수를 보냈다. 마치 마라톤 완주를 축하하듯.
저녁까지 시간이 남아 주방 근처를 어슬렁 거리다 방명록을 발견했다.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걸 구경하던 나에게 사장님이 색연필을 건네주셨고 나는 이 알베르게를 그리기로 했다. 유치원생처럼 ‘짜잔~’하며 그림을 보여드렸더니 사장님이 ‘너무 잘 그려서 말이 안나온다’고 칭찬해주셨다. 뿌듯했다. 언젠가 한국 순례자들이 이 그림을 보고 반가워해주면 좋겠다.
저녁은 한국인 순례자분과 함께 먹었다. 메뉴델디아는 늘 감동이다. 가성비도 좋고 와인 한병도 포함이다. 바빠 보이는 직원이 내 앞에 디저드를 가져다 주었고, 나는 동행이 식사를 마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직원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나에게 “그냥 너가 다 먹어버려!”하고 농담을 건넸다. 바쁜 와중에도 챙겨주다니 유쾌한 저녁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별이 쏟아질 듯 했다. 하늘만 바라보며 살짝 취해 비틀비틀 걷는데, 낮에 봤던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문은 없었지만 안쪽은 들어가지 못하게 나무판자로 막혀있었다. 그냥 버려진 집인가보다 했는데, 그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 군인 방송 처럼 남자목소리가 쉬지않고 이어졌다. 너무 무서웠다. 불도 없고 다 무너진 집 안에서 그런 소리가 나다니.. 거의 울면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분명 귀신이다.
그리고 그 귀신이 내 에어팟 한쪽을 가져간 것 같다. 평소처럼 끼고 잤는데 아침에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침낭도 매트리스도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 이야기하면 모두가 도와줄 것을 알기에 조용히 혼자 두리번 거리다 조급한 마음이 들켰는지 결국 방 안에 순례자들과 사장님까지 다 같이 찾는 소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결국 오늘 아침 나는 내 오른쪽 에어팟과 작별했다. 아직도 아이폰 기능 ‘나의 찾기’에선 내 에어팟이 그 알베르게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 아름다운 평원에서 잘 살렴 내 오른쪽 에어팟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