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17
나는 지금 순례길의 ‘절반’을 향해 걷고 있다. 중간 지점인 사아군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문득 지금까지 내가 어떤 모습으로 걸어왔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처음 출발할 때와는 분명 다른 마음이 되었을텐데, 무엇이 바뀌었을까. 그리고 그 사이 길 위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걸음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이 길에서는 모두가 같은 속도로 걷지 않는다. 누군가는 하루에 10km만 걸으며 여유를 즐기고, 누군가는 30~40km를 쉼 없이 걷는다. 해 뜨기 전에 부지런히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느지막이 출발해 해가 질 때 쯤 도착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런 다양한 템포를 가진 사람들을 보며, 지금까지의 나의 걸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절반을 지나며 알게 된 건, 이 길이 단순히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라, 나 아닌 타인의 속도를 인정하게 되는 길이라는 것. 그들도, 나도, 모두 제각각의 걸음으로 걷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마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지점이 바로 ‘절반’이 아닐까.
여전히 나는 가끔 조급해진다. 모든 것을 내려두고 한국을 떠나 이 먼 곳까지 와있기에, 이 시간들을 어떻게든 ‘의미 있게’보내야 한다는 강박도 있다. 그래서 일까, 문득문득 ‘내가 너무 서두르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이 올라온다. 생장에서 출발했던 첫날들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진다. 마치 아주 오래전, 이미 끝난 여행처럼. 그러다 생각한다. 이 여정을 훗날 되돌아봤을 때, ‘아 그때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후회의 말 대신, 지금 내 감정과 걸음을 충분히 느끼며 걸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연박을 하든 느리게 걷든, 시간은 흐르고 결국 길은 끝이 난다. 어차피 도착하게 되어있다. 그게 하루 뒤든, 한달 뒤든.
아직 여행이 끝난 것도 아니고, 겨우 절반을 지난 것 뿐인데도 나는 벌써 마지막을 바라보며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 마음이 아쉽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내 걸음의 속도를 신뢰하고 싶어진다. 남과 비교하지않고, 내 리듬대로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 걸으며 길에서 만난 마을 주민 아저씨가 갑자기 날 부르더니 ‘순례길에서 너가 원하는 걸 꼭 찾았으면 좋겠다’라고 내 축복을 빌어줬다. 짧고 담백한 말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한마디가 가슴에 오래 남았다.
그 말을 들을 순간 문득 생각했다. ‘나는 이 길에서 뭘 원하고 있는 걸까?’ 순례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질문들의 정답이 저절로 떠오를 줄 알았다. 나도 몰랐던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런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더 혼란스럽고, 아무 답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쩌면 나는 순례길에서 특별히 바라는 것도 목표도 없이 걸어왔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삶의 전환점을 찾기 위해, 어떤 사람은 상실을 이겨내기 위해, 어떤 사람은 아주 명확한 바람을 품고 길을 나선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의미‘를 애초에 설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도착해야할 내면의 종점도 없었다. 길은 분명 계속되고 나는 걸어가고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그러다 문득, 이 질문 자체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어떤 해답을 찾기 위해 걷고 있는 게 아니라, 아직 묻지 못한 질문들을 하나하나 마주하기 위해 걷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결국 질문을 찾아야만 할까?’ 그냥 이대로 질문도, 정답도 없이,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면 안 되는 걸까? 사람들은 왜 항상 무언가를 묻고, 답을 찾아야만 한다고 믿는 걸까? 그 답이 정말 ‘정답’일까? 모두가 의심없이 믿고 있는 그 구조 자체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금 순례길을 걷고 있고, 가끔은 조급하고 떄로는 아무생각 없이 풍경에 감탄하며 웃기도 한다. 그 모든 순간이 쌓여서 결국 나를 만든다. 그렇다면 이 길에서의 시간들. 느리고, 어설프고, 가끔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순간들이 이미 나만의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물음표를 멈추는 연습을 해야겠다. 무언가를 꼭 찾아야만 하는 여정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를 더 깊이 느끼는 여정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어보기로 했다. 정답이 없어도, 그 자체로 의미있는 시간. 그게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순례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