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Day18

by 재인

사아군을 지나면서 풍경은 한결같아졌다. 메세타의 끝자락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평지와 하늘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만큼 단조롭기도 했다. 그래서 이 구간은 시간이 촉박한 순례자들이 버스를 타고 건너뛰기도 하는 구간이라고 했다. 요즘 이 단조로움 가운데 유난히 자주 떠오르는 감정이 하나 있다. 바로 ‘감사함’이다. 순례길에 오기 전, 적금이 만기되었을 때, “그 돈으로 여행을 가라!”라며 내 삶의 시야를 넓혀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내가 무모한 선택을 할 때마다 말려본 적 없이, 그저 “간도 크다” 한마디 하실 뿐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 일하던 시간들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덕분에 순례길을 결심할 수 있었고, 이런 여정 속에서도 마음 한켠이 늘 평온할 수 있었다. 그런 환경을 만들어준 나의 직장에게도 고맙다. 지금 이 순간, 매일 다르게 펼쳐지는 자연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감사하고, 오늘 하루 내 몸을 뉘일 수 있는 숙소가 있다는 것에도 감사하다.


생각해보면 몇 년 전, 나는 감사일기를 꾸준히 썼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에 단 두 가지, 감사한 일을 적는 습관이었지만 그 소소한 꾸준함은 나에게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길러주었다. 그 습관 덕분에 나는 아주 작은 것에도 쉽게 기뻐할 수 있었고, 내가 참 행운아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나는 원래부터 사소한 것에 마음을 잘 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그게, 내가 이 순례길에서도 가장 잘하고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매일 다른 지역, 다른 알베르게에서 잠들고 또 깨어나지만, 이 낯선 듯 익숙한 생활이 반복되며 이젠 내 일상처럼 스며들었다. 익숙한 것들을 놓고 떠났지만 또 다른 익숙함이 나를 품어준다. 익숙한 배낭을 메고, 어제와는 다른 풍경 속을 걷는다. 도착한 마을은 처음듣는 이름이고, 오늘의 침대도 처음보는 공간이지만, 이런 하루가 반복될수록 이 변화마저도 편안하게 느껴진다. 요즘 나는 감기에 걸려 물티슈를 들고 걷는 하루였다. 걷다 멈춰 코를 풀면, 마치 장기까지 쏟아져 나오는 듯한 기세로 콧물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훌쩍이며 오늘은 정원이 유난히 예쁜 한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비건을 지향하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햇살이 잔디를 따뜻하게 비추는 마당에서, 내 몸만한 큰 강아지가 천천히 다가왔다. 처음엔 낯설지만, 내가 자리를 옮길 때 마다 따라오더니, 어느새 애교를 부리며 배를 보고 누워버렸다. 강아지는 내가 다가갈 때 마다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했고, 나는 그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오늘 하루의 피로를 내려놓았다. 맑은 하늘아래에서 귀여운 강아지, 감기에도 불구하고 끝내 30km를 걸어낸 나! 모든 것이 감사하다.

이제 중세시대부터 순례자들에게 중요한 쉼터 도시였던 ‘레온’으로 향한다. 순례길 중에서도 손꼽히는 큰 도시중 하나라, 누군가는 사아군보다도 ‘중간기점’처럼 여긴다. 그런 레온을 앞두고, ‘벌써 레온까지 왔다니..’ 아쉬움이 계속 밀려왔다.


날씨예보엔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기위해 평소보다 이른 새벽 6시 30분 출발을 계획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고, 조용히 일어나 짐을 챙기며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오른쪽 아킬레스건 쪽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평소에도 피곤하면 발목이 조금 뻐근해 지긴 했지만, 이건 전혀 다른 종류의 통증이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무언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 예상치 못한 몸의 신호에 당황했고, 당연하게도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몸은 고되고 하늘은 칙칙하게 내려앉았다. 비는 예고보다 훨씬 먼저 내리기 시작했고, 작은 우비 안으로도 축축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 속을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걷는데 앞이 거의 보이진 않았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왈!”하고 개짖는 소리가 들렸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새벽의 적막과 빗소리 속에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거의 없다. 그냥 비, 비, 비.. 오직 그뿐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었고, 체온도 마음도 점점 축축해졌다. ’날씨 하나에 이렇게나 사람이 가라앉을수도 있구나‘ 싶은 날이 었다.


쫄딱 젖은채로 첫번째 마을에 도착해 겨우 들어간 바에서 따뜻한 아침을 주문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다시 ’콜트‘를 만났다. 난 다 젖은 채로 꼬질꼬질한 모습이었지만, 이 마을에서 출발하는 콜트는 뽀송한 모습이었다. 젖은 옷에 물을 털며 앉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한국에 내 방 사진을 보여주게 되었는데, 내 방 벙커침대를 보던 콜트가 유심히 보더니 ’너 방도 알베르게야?‘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 순간 나도 피식하고 웃음이 터졌다. 순례자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유머였다. 아침을 먹고, 다시 비를 맞으며 걷는다. 레온으로 향하는 길. 꽤 많은 사람들이 레온부터 순례길을 시작하기도 한다. 레온부터는 또 다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겠지. 어디서부터 걸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결국 모두 같은 길 위에 있다. 어쩌면 방향만 같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길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걷는다. 오늘 하루의 걸음이 나와 누군가에게 행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럼 비가 좀 그쳐야할텐데. 그리고 이 글 위에서 만난 모든 얼굴과 순간들이 내 마음 어딘가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