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Day19-20

by 재인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 대학 지인을 통해 한 사람의 연락처를 받았다. “내 군대 선임이 지금 순례길을 걷고 있어. 연락해봐!” 순례길을 걷고 있던 그 사람의 이름은 ‘승호’였다. 승호는 나보다 며칠 앞서 출발한 상태여서 직접 마주친 적은 없지만, 종종 서로의 순례길 소식을 주고받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직접 만난 사이가 아닌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연박으 하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승호는 마음에 드는 도시에선 여유롭게 멈춰 머물렀다. 덕분에 어느새 우리의 거리는 좁혀졌고, ‘레온’에서 드디어 일정이 맞게 되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 나는 쫄딱 젖은 채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 입구에서 연박중인 승호가 뽀송뽀송하게 예쁜 우비를 입고 ‘혹시 재인이누나..?’라고 말했다. 그렇게 우린 결국 만나긴 만났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이미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했다. 서로의 얼굴보다 말부터 먼저 나눴기 때문일까. 쫄딱 젖은 생쥐꼴로 마주한게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웃겼다.

레온에 왔으니 당연히 레온 대성당을 보러가야했다. 론세스바예스에서부터 신박한 알베르게의 정보와 성경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신 한국인 쉐프님과 함께 길을 나섰다. 성당 입구 위 스테인드글라스에 열두 제자가 그려진 것을 발견했을 때, 괜히 어린이용 성경이라도 읽어본 보람이 느껴졌다. 성당 내부는 어두웠고, 스테인드글라스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여러 작품들을 마주했다. 그 안에서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한 조각상이었다.


피투성이로 죽은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마리아.

그 조각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슬픈 마리아였다. 너무 사실적인 표정. 얼굴 근육하나 하나에 맺힌 고통. 신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을 잔인하게 잃은 어머니의 얼굴.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멈췄다. 사실 성당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끌어안은 작품은 수도 없이 많이 봤지만, 그냥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냥 집중하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고 정말 몰입하게 되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조각상 속 이야기들, 작품들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기도들. 언젠가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나는 또 어떤 마음이 들까? 그건 그때가 되어봐야 알겠지만.


저녁은 조금 특별하게 보냈다. 레온까지 왔으니, 제대로 된 한끼를 먹어야지. 승호, 쉐프님과 함께 리조또, 스테이크, 와인까지 곁들인 호화로운 저녁을 먹었다. 북적이는 레스토랑 안, 식탁 위 웃음소리. 큰 도시의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초반에 함께 걸었던 한국인 순례자 무리들과도 재회했다. 어쩌다보니 각자의 속도로 흩어졌지만, 다시 이 도시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반가움이 입가에 먼저 번졌다. 몬 본 사이에 생긴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왁자지껄 웃고 떠들었다. 우린 다시 함께 걷는 건 아니지만, 이제 이 길은 다들 익숙해졌다. 오늘 몇km 정도 걸어야 적당할지, 어디쯤에서 밥을 먹어야할지. 그런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같은 언어로 통했다. 서로가 걸어온 시간은 달라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산티아고, 그 종착지에서 또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그땐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누군가는 그 곳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눌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우리는 같은 길 위에 있고, 서로의 걸음을 축복하며 웃고 있다.

결국 나는 레온에서도 연박 하지 않았다. 다리에 무리가 와서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이상하게도 레온이라는 도시에 정이가지 않았다. 비가 너무 많이 왔어서 내가 괜히 레온한테 서운했나보다. 테이핑만 한 채 다시 길을 나서기로 했다. 길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 속을 걷다 보니 ‘이게 대체 무슨날씨람..?’ 싶을 정도였다. 순례길에서 처음 맞이하는 안개라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대부분 찻길 옆으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도로의 소음 너머엔 뿌옇게 안개가 가라앉은 농지와 들판이 있었고, 마치 세상이 흐릿한 필터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레온을 지나고 나선 마을들이 제법 자주 나와서, ”다음 마을에서 쉴까?“하다보니 결국 쉬지 않고 쭉 걸어 일등으로 알베르게에 도착하게 되었다. 처음 해보는 일등! 덕분에 침대를 고를 수 있는 특권도 누렸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사장님의 어린딸 ‘나라’가 엄마를 따라 방을 안내해주며, 일회용 침대커버를 건넸다. 앳된 얼굴로 성실하게 엄마를 돕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센스있게 용돈이라도 건넸어야했는데, 그걸 못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 작은 손에 초콜릿이라도 쥐어줄 걸.


이 알베르게는 한국인 순례자들을 타켓으로 한 곳이었다. 저녁 메뉴로 삼겹살이 제공되었는데, 고추장과 밥, 상추까지 함께였다. 사장님은 한국인이 아니었지만,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식탁을 그대로 재현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만큼 한국인 순례자들이 많고, 이 길을 걷는 우리의 입맛을 아는 알베르게 사장님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뜻이겠지! 저녁을 기다리며 테라스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일기를 썼다. 솔솔 부는 바람, 다리에서 느껴지는 피로, 그리고 일찍 도착한 날만이 누릴 수 있는 이 여유로움. 이렇게 나른하고 느긋한 오후도 오랜만이다 싶었다. 해가 질 무렵, 저녁시간이 되었고 알베르게에서는 스페인 음식과 삼겹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는데, 자연스레 한국인과 외국인 테이블로 나뉘었다. 우리가 먹던 걸 보던 외국인들이 ”그거 한국에서 유명한 음식이야?“하고 물었고 우리는 조금 민망하게 웃으며 ”맞아 엄청!“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삼겹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 그동안 스페인에서의 식사에 만족하고 있었고, 한식이 특별히 그립지도 않았다. 언제 또 이런 유럽식 식사를 해보겠냐며 즐거워했는데.. 그런데 막상 삼겹살을 입에 넣는 순간 알았다. 아, 나도 모르게 그리웠구나. 그 익숙한 돼지기름과 고추장 맛. 한접시를 뚝딱 비우고 나니 마음까지 든든해졌다. 스페인 어딘가 작은 마을에서 한국의 맛. 풍족한 속과 따뜻한 마음으로 하루의 끝.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