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21
오늘은 ‘아스트로가(Astorga)’까지 걷는다. 아킬레스건 통증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결국 소염제를 복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걷는 중간중간 아킬레스건이 찌릿하게 당기지만, 이런 통증도 결국은 스쳐 지나갈 일이라 여기며 그저 묵묵히 길을 따라 걷는다. 지루했던 평원이 조금씩 끝나고, 길이 다시 예뻐지기 시작했다. 들판을 지나 오전 중, 까미노에서 가장 길다는 다리에 들어섰다. 햇살이 막 퍼지기 시작하던 시간이었다. 온 세상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그 풍경 속에서, 돌길이 이어진 긴 다리를 한 걸음씩 밟아 나갔다. 다리 끝엔 엔틱한 건물들과 조용한 마을이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아 오늘도 하루가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이게 순례길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평원은 다 지난건지 풍경이 또 달라졌다. 완만한 오르막과 황토빛이 가득한 언덕들. 건강한 흙의 냄새와 부드러운 바람이 어우러져서 마치 황토 숲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리막이 나왔다 싶으면 금세 또 오르막이 이어졌고, “어차피 내려가면 또 오를텐데!”하며 묘한 체념 섞인 웃음을 땀과 함께 흘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새로운 경관이 주는 설렘은 여전히 컸다. 오늘도 처음 보는 하늘, 처음 보는 길, 처음 보는 하루니까.
어느 오르막을 넘은 끝에서 도네이션 스팟을 발견했다. 평소 도네이션은 작은 테이블 위에 바나나나 과자 몇 개, 물 등등 미니멀하게 올려진 정도였는데, 이곳은 달랐다. 누군가의 마당처럼 넓은 공간이었고, 큰 천막 아래 마련된 원형 테이블엔 과일과 다양한 핑거푸드가 가득했다. 여기가 바가 아니라 도네이션이라고? 함께 쉬던 순례자들도 여유롭고 밝은 표정이었다. 도네이션을 운영하는 분의 강아지, 보더콜리 한마리는 공기가 다 빠진 공을 물고 몇 번이나 내게 다가왔다. 집요한 보더콜리와 공놀이로 지친 나를 보며 모두가 웃음을 띄웠다.
오렌지를 짜 마시려고 착즙기를 살피던 찰나, 어디선가 익숙한 한국어가 들렸다. 미국에서 오셨다는 한국인 순례자 무리였다. 그 중 ‘로즈마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분과 그 분의 오빠는 무려 85세셨다. 내가 예전에 길에서 만나 숙소를 알아봐달라고 한 부탁을 응해 예약을 도와드린 적이 있었는데, 다시 만나 무척 반가워해주셨다. 여사님은 내가 오렌지 짜는 걸 보고 시원치 않으셨는지 본인이 직접 잘라 착즙기에 넣고 꾹 눌러 오렌지 주스를 한컵 만들어주셨다. 나는 도네이션 앞 벤치에 앉아 등산화를 벗고, 짜주신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가져온 배도 한입 베어 물었는데, 그 순간 배 맛이 그렇게 환상적일 수가 없었다. 납작복숭아? 아니. 배가 최고다. 시원하고 달콤한 즙이 입 안 가득 퍼졌고, 나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 행복해서! 그 모습을 본 한 외국인 순례자가 내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너는 항상 웃고 있어서 참 보기 좋아.”그 말 한마디가 오늘 하루를 걷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모두 채워주는 듯 했다.
아스트로가는 레온보단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도시였다. 마트도 엄청 커서 괜히 설레기도 했다. 생각보다 순례길에선 마트를 가기 힘들다. 쉼을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 주말엔 문을 닫고, 보통 순례자들이 주로 도착하는 2~3시엔 피에스타. 즉 브레이크 타임. 그때도 문을 닫는다. 그리고 아예 마트가 없는 작은 마을도 많다. 한국으로 치면 구멍가게만 전전하다가 갑자기 이마트가 눈 앞에 나타난 기분이다.
승호가 파스타를 만들어주겠다며 마트에서 재료를 샀다. 무니시팔 알베르게의 주방은 경쟁이 치열해 타이밍을 놓치면 밥도 못 먹을 수 있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우리는 재료를 손질했고, 여러 사람의 손이 닿은 식기로 승호는 정성껏 파스타를 완성했다. 파스타와 와인을 들고 테라스로 나왔는데, 와인오프너가 없었다. 3층 짜리 알베르게를 오르내리며 “혹시 오프너 있어요?‘라고 순례자들에게 물어보던 중, 뒤에 있던 호주 순례자가 웃으며 오프너를 건네주었다. 덕분에 풍성한 저녁이 완성 됐고 테라스에서 보이는 쨍쨍한 해에 비치는 아스트로가를 보며 밥을 먹었다.
아스트로가는 볼 것도 많았다. 가장 먼저 간 곳은 가우디가 설계한 주교궁.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곡선으로 휘어진 기둥과 천장, 바닥의 화려한 타일이 한눈에 들어왔다. 장난감 집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평소에 거쳐갔던 고요하고 웅장한 성당들과는 달리, 밝고 화려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가우디의 작품들 보다 훨씬 차분한 건축이라고 들었지만, 타일 하나, 곡선 하나에도 독특함이 남아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초콜릿 박물관에 갔다. 초콜릿으로 유명한 아스트로가답게 다양한 초콜릿 틀, 향, 포장지들이 가득했다. 보통 순례자들이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저녁을 먹고 쉬는데, 승호와 나는 낮잠을 포기하고, 이걸 보러왔다는 생각에 이상하게 웃겼다. 마지막엔 시식용 초콜릿도 나눠주어서 둘이서 엄청난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초콜렛을 입에 넣고 계속 웃으며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알베르게로 돌아온 뒤, 이층침대 두 개가 있는 작은 방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승호의 R.O.K.A 티셔츠를 본 외국인 순례자가 말을 걸어왔다. 해군으로 근무했던 분인데, 몇십년 전 진해로 파병왔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인상이 무척 부드러우셨는데 해군이었다니. 그는 우리에게 복무할 때 찍은 젊었던 적 그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나는 그분이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주셨다는 생각이 들어, 가방에 있던 태극기를 조심스레 건넸다. 태극기를 받은 그의 눈빛은 조용히 반짝였다. 작은 방 안에서 언어를 넘어 감사함이 오갔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