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시작할 수 없었던 이유

제15장 -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기 전에, 기준부터 다시 세운 시간

by 홍다정

[ 10년의 패션을 놓아준다는 것]


사람들은 내가 3년 정도 패션을 하다 그만둔 줄 안다.

하지만 내게 패션은 10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쇼핑몰에서 시작해,

3년제 패션과 에서의 시간, 그리고 비이커와 분더샵에서의 판매까지.

내 20대는 거의 전부 ‘옷’이라는 문장으로 쓰여 있었다.


그래서 더 쉽게 놓을 수 없었다.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이 길을 놓는다는 건,

단순히 직업을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요리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게 문제였다.


그 막막함은 나를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참을 울었고, 결국 템플스테이까지 떠났다.


도망치듯 시간을 보냈지만, 다시 돌아왔다.

나는 내 선택을, 반드시 결과로 증명하고 싶었다.


[뼈저리게 깨달은 '기본'의 무게]

나는 기본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본에 집착한다.

그 집착은 일본 워킹홀리데이 시절에 만들어졌다.


당시 나는 “일단 가보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떠났다.

그런데 막상 부딪혀보니 그건 생각보다 훨씬 안 되는 일이었다.


말이 막히는 순간이 반복됐다. 알아듣지 못하고,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웃으며 넘기는 순간들이 쌓이고 쌓였다. 그때마다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돌았다.


“기본이라도 배우고 올걸.”


그 후회를 매일같이 했다. 지금은 일본어로 소통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그런데 나는 안다. 문장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걸. 기본이 비어 있다는 걸.


아는 사람 눈에는 그 차이가 다 보인다는 것도.


그래서 가끔은, 이유 없이 자존심이 상한다. 그 경험 하나로 충분했다.

기본이 없으면, 결국 ‘비슷한 수준’에서만 맴돌게 된다는 걸.


그래서 요리만큼은 다르게 하기로 했다.


절대로,

기본 없이 시작하지 않기로.


다시는 그렇게 서 있고 싶지 않았다.


["가게 차려주세요"라는 응원이 무거웠던 이유]

유튜브에 요리 영상을 올리면 수많은 따뜻한 댓글이 달렸다.


“가게 차려주세요.”

“오픈하면 무조건 갈게요.”

“언니가 만드는 건 다 먹어보고 싶어요.”


고마운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들을 볼수록, 더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


“그래, 가게 해볼까?”


그렇게 가볍게 말해버리는 순간,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이 너무 가벼워질 것 같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요리라는 게, 그렇게 시작해도 되는 세계가 아니라는 걸.


준비되지 않은 채 뛰어드는 건, 평생을 바쳐 이 일을 해온 사람들 앞에서 너무 무례한 일이었다.

그들이 나를 모르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그냥,

“요리 좋아하니까 가게나 해볼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함부로 시작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 그리고 이미 시작된 마음]

요리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네가 책임져라"며 믿어주던 아빠는 코웃음을 쳤고,

엄마는 절대 안 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주방 일이 너무 고되다는 이유였다.


사실 엄마는 평생 주부로 살며 새벽 5시에 일어나 가족의 밥상을 차리셨다.

우리 집은 늘 밥 짓는 냄새로 하루가 시작됐고,

온 가족이 7시 전에 모여 아침을 먹는 게 당연한 루틴이었다.


엄마에게 주방은 가장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일하는 주방’은 전혀 다른 세계라고 이야기하셨다.


심지어 우리 엄마는, 언니와 내가 설거지하는 것조차 싫어하셨다.


손에 물 묻히는 일,

무거운 걸 드는 일,

그런 것들을 딸에게 시키고 싶지 않으셨던 거다.


손에 물이 마르지 않고,

무거운 걸 들고,

뜨거운 불과 기름 앞에 서 있어야 하는 곳. 위험하고, 힘들고, 쉽게 권할 수 없는 공간.

그래서 엄마는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막으려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미, 요리가 아니면 안 되는 상태였다.


문득 중학교 2학년 때의 내가 떠올랐다.

2009년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

혼자 서점에 가서 빵 만드는 책을 사 들고, 이재모 제과제빵 학원에 보내달라며 떼를 쓰던 아이.

밥솥으로 브라우니를 만들고,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어 하나하나 기록하던 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 그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엄마는 그때도 안 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결국, 이 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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