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면 세탁기가 돌아간다. 바닥에 널브러진 장난감을 치운다. 화장실에 락스를 뿌리고 조용히 싱크대 앞에 선다. 적절한 온도. 적절한 온도를 찾는 것은 단번에 되지 않는다. 빨강과 파랑의 어느 중간 지점 온도에 맨손을 들이대고 체크한다. 중간 지점. 마음이 편해진다. 가만 보니 펄펄 끓는 뜨거운 온도와 얼음처럼 차가운 어딘가를 찾아 헤맸다. 젖은 손을 가만히 바라본다. 싱크대 앞에서 빨강으로 파랑으로 움직여 본다. 어디서부터 차가워지고 어디서부터 뜨거워지고 있는가. 정확히 칼로 양분할 수 없는 모호한 지점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역시 알 수 없다. 어디부터가 차가운 지점이고 어디부터가 뜨거운 지점인가. 이 질문에 잠시 멍하게 답을 내려본다. 설거지를 시작한다. 오랫동안 쌓아놨던 설거짓거리는 심하게 눌어붙어 있다.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은 잔업들이 미뤄지고 미뤄지다 여기저기 눌어붙었다. 꼭 무언가를 닮았다.
이웃에 실례다.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유일한 시간이다. 어쩔 수 없다. 내 잔업이 누군가에게 때로는 실례라는 사실을 안다. 일주일 한 번. 그래, 실례키로 했다. 염치없지만 그러기로 했다. 어차피 이것이 아니더라도 이 삶은 주변에 실례 끼치는 일이 많으니까.
아이를 덮은 이불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지켜본다. 아이의 들숨과 날숨을 세어본다. 들어오고 나간다. 어느 숨 하나 머무르지 않는다. 안심이다.
아이의 숨에 머물던 것들이 밖으로 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그녀를 닮은 아이의 이마를 만진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그녀를, 아이를 통해 본다.
“아이 장례는 잘 치렀어?”
그녀의 질문이 가슴에 꽂혔다. “응. 잘 치렀어. 걱정하지 마.” 그녀의 눈동자가 슬픔에서 증오로 바뀌었다. 순간이 눈에는 알 수 없는 색깔의 감정이 차오른다. 잊히지 않는 기억. 그 중력에 이끌려 내가 그녀 주변 궤도를 돌 때, 나는 미친 사람처럼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 어쩌면 그녀가 맞았을 수도 있겠죠?”
나는 가운을 입은 젊은 의사에게 물었다.
“아니요.” 의사는 사무적이고 딱딱했다. 그깟 감정 따위는 호르몬 농도가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다. 의사는 그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 말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농도와 닮았다고 했다. 머릿속 어느 곳에서 짙은 농도의 무언가가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않는 것이 들리는 까닭은 약으로 충분히 조절 가능하다고 했다.
그녀가 아이의 장례를 치렀는지 물었을 때,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머릿속에서는 어미를 잃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고, 내 눈앞에는 아이를 잃은 어미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가 죽었다고 믿었다. 왜 그런지 따지고 들 수 없다. 그 논리는 그 논리대로 완벽하다고 했다. 의사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기로 했다. 그러기로 했더니 조금 편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하나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어미를 잃었다.
아이의 이마는 어미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의 눈꺼풀 뒤에 펼쳐질 세상에 호기심을 갖는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의사는 아이가 같은 병을 얻을 확률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것은 일종의 유전이라고 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거나,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 그것은 본인이 가장 괴로운 일이라고 했다. 유전이라는 것은 그렇다. 어미에게 있으니, 아이에게도 있을 수 있다. 그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다는 것이다.
예전 장자는 나비 꿈을 꾸었다. 그러곤 자신이 나비가 아닌가 혼동했다. 아이도 그런 실감 나는 꿈을 꾸길 기대한다. 피아를 잊어버려 결국 꿈속의 자신을 진정한 자신으로 기억할 만큼, 실감 나는 꿈 말이다. 꿈을 깨면 시작될 악몽이 조금이나마 희석되길 바란다. 그것을 위해, 나는 아버지로서 바둥거려본다.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눈 감는다. 깨끗하게 씻어지고 있구나. 묻었던 먼지 한 톨과 때가, 특히 어제의 흔적들 말이다. 과거가 벗겨지는 소리. 마음이 정돈된다.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아이의 머릿속. 내 머릿속도 이처럼 시원하게 씻겨져 내려갔으면...
스마트폰을 켠다. 가사 없는 피아노 음악을 실행한다. ‘내 이야기구나’ 가사가 없으니 음악의 주인은 나다. 오직 나로서 유일한 해석을 한다. 눈을 감는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내 이야기가 그런 부류의 것이길 빈다. 궁상떨다 잠든다.
휘몰아치다가 일상이 찾아온다. 감사하다. 동시에 후회스럽다. 왜 그랬을까. 지금은 현실이 맞는가. 몇 번 생각한다. 떠올려보면 그렇다. 평범한 일상에 그녀는 불쑥불쑥 찾아온다.
이것은 세 번째 화살이라고 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찾은 절에서 스님은 울고 있는 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스님이 내주신 따뜻한 차를 마셨다. 의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눈썹까지 하얗게 새어있는 노승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차갑고 젊은 의사에게 건네는 것보다 쉬웠다. 스님의 법복은 의사의 것보다 느슨했고 헐렁했다. 그 색깔도 누리끼리했다. 그 어느 것 하나 칼로 자른 듯 한 것이 없었다. 백색 가운에 반사되던 반짝거림도 없었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이라오. 나쁜 줄 알면서 나쁜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좋은 줄 알면서 눈을 감기도 하는 것이지.” 노승은 자신의 앞에 있는 따뜻한 차에 입을 댔다. 그에게 그 어느것 하나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입을 오므린 그의 입술에 잔주름을 바라본다.
“네. 스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을 뿐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면 다시금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할지 몰랐다. 어쩌면 ‘이때다’하고 모든 걸 털어 놓고 싶기도 했지만, 내가버린 감정의 쓰레기를 상대에게 던져버리고 싶지 않았다. 스님은 차로 목을 축이고 답했다.
“불행의 화살을 맞았을 때, 어떤 사람은 고통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지. 그러나 자신이 왜 그 화살을 맞아야 하는지, 상대는 나에게 왜 화살을 쏘았는지, 그런 것들에 집착하네. 그러다 보면, 상대를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법이지. 그것이 두 번째 화살이네.” 노승의 따라준 차라 엽차를 코끝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엽차에는 은은한 김이 피어올라 코끝을 간질였다.
“두 번째 화살이요?”
“두 번째 화살도 첫 번째 화살과 같은 것이오. 다른 점은 두 번째 화살은 자신이 만들어낸 화살이라는 것이네. 어떤 사람은 그 고통과 슬픔에 다시 한 번 주저 앉곤 하지.”
“네. 스님.”
그가 따라준 엽차를 마신다. 따뜻한 목 넘김이 울음을 삼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노승은 가만히 밖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뗐다.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야. 그건 나쁜 게 아니라 어리석은 것뿐이지. 모른다는 것은 깨치면 그만이오. 아마 젊은 청년은 세 번째 화살에 맞고 계신 듯 한데?”
“세 번째 화살이라뇨?”
“쏜 사람도 잊고 있고 자신도 잊었어야 할 고통을 꾸준히 재생산해가며 그 고통을 무한대로 맞고 있는 거지. 첫 번째 화살은 분명 상대의 잘못이나, 두 번째, 세 번째 화살부터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네.”
스님은 엽차를 입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다가 그는 차를 약간 흘렸다. “어이쿠, 괜찮으세요?” 잽싸게 스님에게 휴지 몇 장을 뽑아다가 드렸다. 스님의 법복이 진한 색으로 물들었다. 노승은 조용히 자신의 법복을 휴지로 닦았다.
“젊은 나이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구려?” 스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축축하게 젖은 휴지 조각을 내게 던졌다. ‘에잇’
“어! 스님?” 스님이 던진 휴지 조각을 받았다. “이걸 왜 제게….” 스님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휴지 조각을 받아 든 나는 그것을 휴지통에 집어 넣었다.
“잘했소. 의미가 사라졌다면 쥐고 있지 마시고 휴지통에 버리시구려. 상대가 왜 그것을 주었는지,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그런 건 깨끗하게 잊어버리시오. 상대의 잘못은 한 번이오. 그것을 재생산하여 상대에 대한 원망도, 기억도 키우지 말고. 모두 잊어버리시오. 그러면 무한으로 만들어지던 세 번째 화살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것이오.”
스님의 말은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렇다. 그녀와의 기억은 죽었어야 했다. 그 기억을 다시 살려내어 그녀와 나 둘 다 괴롭히고 있었구나. 스님이 따라준 엽차를 입가에 가까이 댔다. 그래, 이제 그녀를 놓아 버려야겠다. 하지만 그 고통의 중독성이 다시금 나로 하여 그녀를 보고 싶게 했다.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소환해보자. 잊혀야 했던 그녀를 마지막으로 다시 불러드렸다.
그녀의 첫인상은 이랬다. 넘어서기 어려운 벽. 밝은 데서 보면 밝았고, 어두운 데서 보면 어두웠다. 그 독특한 매력은 나를 잡아당겼다. 모순과 반전이 주는 매력. 나는 그것을 참아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 강한 이끌림에 빨려 들어갔다. 지나가던 빛마저 빨아드리는 강력한 블랙홀 같았다. 중앙으로 이끄는 강한 중력. 모든 걸 끌어당기는 블랙홀 말이다. 그 중력의 힘에 도달하지 못한 빛은 블랙홀 가장자리 어딘가를 맴돈다. 블랙홀 주변에 하얗게 새어 나오는 빛을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했다. 나는 사건의 지평선, 그 어느 선상에서 머물렀어야 했다. 그녀와 가까운 가장자리 어딘가를 맴돌다가 우주 바깥으로 튕겨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의 궤도는 사건의 지평선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시공간이 왜곡되며 존재가 흔들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녀의 일부가 됐고, 그녀는 나를 흡수해 내 존재를 삼켰다. 나는 우주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됐고 그녀만 남았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매력이었다.
맹독성의 매력은 멈추지 않았다.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여야 하는 곳에서 그녀는 어른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는 아이 같았다. 그녀가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일 때, 나는 세상 사람들은 모를 희열에 빠져들었다. 양면 모두를 아는 사람이 혼자일 거라는 희열. 그것은 맹독처럼 강렬했고 중독성이었다. 그녀의 양면성은 나만의 것이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언제나 한쪽 면만 보여주었다. 그 모습은 달과 같았다. 뒤편으로 날아가 보지 않으면 영원히 알 수 없는 달의 뒷면처럼 그녀는 누구에게도 뒤편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바라본 그녀는 그랬다. 나는 그 달의 뒷면을 보았다.
공기 한 점 없는 냉혹한 환경, 앞은 환하고 뒤는 어두운…. 앞은 따뜻하고 뒤는 차가운…. 그 쓸쓸하고 척박한 모습은 나에게 동정심을 일었다. 떠올려보면 나 또한 그렇다. 물리학을 공부했지만, 무역회사에 다니는 아이러니함. 사람들은 나에게 공부를 계속하길 권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이 기본적으로 쌓아놓은 디폴트값을 벗어나는 일. 나는 그것에 희열을 느꼈다. 공부를 멈췄을 때, 가장 속상해했던 건 부모님이다. 워낙 괴짜 같은 성격이라 어머니는 나의 일탈이 일시적일 거라고 기대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처음부터 무심하던 아버지는 이내 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머니만큼은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내 주변에서는 항상 나를 만류했다. 나를 가장 만류했던 건 같은 실험실에 있던 병우였다.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이제와서 포기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 병우는 내가 실험실을 나간다고 했을 때 가장 아쉬워했다. 병우는 키가 작고 왜소했지만 어딘지 똑 부러진 성격 탓에 실제보다 커 보였다. 병우와 나는 항상 단짝이었다. 그런 우리 둘을 보고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짧달막한 병우와 키가 큰 나는 모든 게 반대라고 했다. 병우는 누가 보더라도 ‘과학’을 사랑할 것 같은 외모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는 실제로 공부벌레와는 거리가 멀었다.
“너 혹시 달의 뒷면 궁금하지 않니?” 나는 물었다. 병우는 알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한 번도 가 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죽어. 결국 모르고 끝나는 일들 말이야.” 나와 병우는 다른 의미에서 물리학을 받아들였다. 둘 다 물리학을 사랑했지만, 내가 바라본 물리학은 조금 다른 측면이었다. 물리학은 만물의 이치를 아는 학문이다. 나에게 물리학은 ‘철학’이었고 병우에게 물리학은 과학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내 삶은 직선이었다. 모범적이었을 삶,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대를 들어가는 시시한 삶.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참 물리학과 닮지 않았다.
“우주에는 직선이 없어. 과학고, 공대, 실험실. 너무 인생을 직선처럼 사는 것 같지 않아?” 병우는 내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서 물리학에 대한 호기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줄었다. 물리학에서 진행 방향과 속도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다. 도착할 법한 곳에 도착하는 일은 그닥 셀레는 삶이 아니었다. 공식에 숫자를 대입하여 정답을 유추할 수 있는 삶. 그것은 내 기준에서 전혀 물리학 적이지도 않았고 내 삶이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도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가장 내가 할 것 같지 않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보리라. 지금껏 오른쪽 길로 갔다면, 일부러 왼쪽 길을 찾아본다. 왼쪽 길로 다녔다면 일부러 오른쪽 길을 선택해보리라. 어린 시절 가졌던 물리학에 대한 그 순수한 호기심을 다시 가져보리라. 병우는 끝내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나에게 병우의 이해는 필요치 않았다. 나는 병우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변칙적인 삶을 살 거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 가능성으로 가득 찬 삶 말이야.” 현대 물리학에서는 풀지 못하는 숙제가 하나 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통일 이론 말이다. 진행 방향과 속도를 알고 있다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거시세계. 모든 것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는 미시세계. 이 둘은 경계가 애매하다. 작은 것을 확대하고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알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시점이 생기는데, 그 경계가 어딘지 아직 인간은 모른다. 미시세계는 온통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거기에는 규칙도 없고 이유도 모른다. 이 미시세계의 움직임. 그것을 양자역학이라 한다.
이것은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이 설명하신 말씀이셨다. 선생님의 말씀에 병우가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어디서부터가 거시세계고 어디서부터가 양자역학이 적용되는 미시세계인가요?”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 문제는 현대 물리학계에서 풀지 못한 숙제 중 하나지. 어디서부터 양자역학 이론이 적용되는지 그 경계는 아직 모르네.”
병우의 호기심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가능성만 존재하는 양자역학보다 거시 물리학을 신뢰했다. 진행 방향과 속도를 알고 있으면 그다음에는 어떤 모양이 될지 예측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병우가 물리학에 끌린 이유였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창문 밖에 있는 건물의 높이를 계산했다. 자신이 앉은 곳에서 다음 역까지 걸어서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보는 것도 좋아했다.
“준현아, 이것 봐. 우리는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지만,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뭐든 예측할 수 있어.” 병우가 말했다. 그에게 물리학의 매력은 예측이었다. 계산가능한, 예측가능한 것에 그는 희열을 느꼈다. “너는 우주에 직선이 있다고 생각해?” 나도 질문을 했다. 우연히 길에서 보이는 꽃, 나무, 풀, 구름. 자연이 만들어낸 모든 것은 곡선일 뿐이다. 병우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우주는 곡선을 닮았어. 어쩌면 나는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 우주를 닮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거, 참 양자역학 같은 말이네.” 그와 생각이 갈라진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예측하지 못하는 삶에 이끌렸다. 반대되는 것에 이끌렸고 모순적인 것에 이끌렸다. 내가 하지 않을 선택을 고민 없이 하는 것에 매료됐을 때, 내가 내린 정답은 그랬다. 내 진행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동해보자. 미시세계가 갖고 있는 양면성이 곧 우주를 닮았으리라.
지도교수는 이를 몹시 아쉬워했다. 병우와 나는 분명 가는 방향이 달랐지만, 우리가 사회에서 할 일이 있을 거라 했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춰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병우는 즐거운 기대감이라고 표현했고, 나는 관찰자의 간섭이라고 표현했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자가 간섭하면... 파동은 입자로 변한다.
누구에게나 양면의 모습은 있다. 그녀의 그런 양면성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아마 병우가 그녀를 봤다면, 작은 흔들림도 없었으리라. 병우는 예측 가능한 세상만을 좋아했으니. 그녀의 양면을 여과 없이 보는 것은 행복이었다. 나는 관찰자가 되어 그녀을 지켜봤다. 내가 바라보기에 그녀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마치 분명히 파동이었는데, 입자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내가 아는 모습은 대외적인 그녀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들이었다. 이 모두를 나에게만 비치는 것도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가진 양면은 온수기가 만들어낸 빨강과 파랑보다 더 분명했다. 칼처럼 나눠진 구분점. 그녀의 정체성이자,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를 알게 된 곳은 조그만 무역회사였다. 전 직원이 열댓 명 되는 중소기업이었다. 나는 그곳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갔다. 회사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 내부에 친한 직원들끼리만 메신저로 유쾌한 잡담을 하는 평범한 회사였다. 경직됐지만 유쾌한 아이러니. 그 양면에 나는 역시 매력을 느꼈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던 공학도가 무역회사라니... 사람들은 황당하고 어이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할수록 나는 내 선택에 더 만족했다. 예상과 크게 벗어난 삶을 산다는 것은 내가 드디어 파동에서 입자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루하루 살아 있음을 느끼는 그 공간에서 나는 ‘재경’을 먼저 알았다. 특이한 사람이었다.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선생이 아니라, 무역회사 입사라니…. 따지고 보면 나만큼 양면적인 사람일지 몰랐다. 공무원이 체질이 아니라는 그의 성격은 티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산에서 상경한 재경은 많은 부분에서 나와 맞았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촌놈이었는데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삶의 배경, 비슷한 철학이 서로를 끌리게 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병우와도 잘 어울리면서 가장 상극인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치 나처럼.
“준현 씨, 담배 피워요?” 서울말에 경상도 억양이 잔뜩 묻었다. 담배는 피지 않지만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장되지 않는 쉬는 시간은 유독 흡연자에게 관대하다. 나는 그 사실은 알고 있다. 재경을 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갔다. 꼭대기에 올라 보니 서울 전경이 보였다. 이곳이 서울이구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 건물도 많고 차도 많구나. 모든 게 저렇게나 많은데, 내 건 하나도 없구나. 이 또한 양면적이구나. 삶에서의 물리학은 나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냉혹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나에게는 이 또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상들이었다. ‘소유의 아이러니’. 그저 학문적 호기심일 뿐이었다. 생각이 스친다. 옥상에서 보이는 아파트. 저기, 사람이 다 채울 수 있을까, 생각에 빠진다.
재경이 먼저 입을 뗐다.
“오늘 끝나고 일정 있어요?” 막 불붙은 담배를 빨아들이며 그는 말했다. 담뱃불은 그의 한숨 호흡만큼 크게 밝아졌다 희미해졌다. 연기가 그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약속은 항상 없죠.”, “끝나고 소주 한잔할래요?” 거절하기도 전,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재경 씨랑, 준현 씨 일은 할 만해?” 전태원 팀장이었다. 그의 얼굴은 검고 몸은 단단했다.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그가 수년 전까지 체육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은 겉모습만으로 이질적이지 않았다. 그가 체육교육학을 전공했고 재경이 수학교육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둘은 사내에서 꽤 연결되곤 했다. 재경의 전공이 수학교육학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무역회사가 선생님으로 채워진다며 웃었다. 의미 없는 농담이지만 전태원 팀장은 그것이 거슬렸다. 전태원 팀장이 교사하지 않는 이유는 법 때문이다. 그는 여학생을 추행했다는 이유로 교육 쪽 일하지 못하게 됐다. 물론 이는 회사 내에서 소문이었다.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의 소문은 워낙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어쨌건 그에게는 ‘교육학과’ 출신이 하나 더 들어와서 사내에 불필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분명 불편한 일인 듯 했다.
“아. 네” 우리는 어물쩡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재경은 아직 몇 모금 피지도 않은 담배를 손으로 털어냈다. “저희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머금은 담배 연기가 그 말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그러세요. 힘든 일 있으면 말하고.” 전태원 팀장의 말은 존대가 섞였지만, 거기에는 서열을 정돈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
“거참, 팀장한테 초장부터 안 좋게 찍혀 갖고 골치 아프게 됐네 예. 아무튼 이따가 끝나면, 요기 앞에 편의점에서 봐요.” 교육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재경은 전태원 팀장에게 미운털이 박혀있었다. 재경이 업무적으로 실수할 때마다 ‘교육학 전공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어눌해요?’라는 농담이 따라다녔다. 이 말은 은근히 전태원 팀장을 자극했다. 소문에 의하면 전태원 팀장은 그 일로 아내와 이혼했단다. 그의 아내는 딸을 데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전 팀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법과 사회. 그 어디에서도 그 말은 인정받지 못했다. 팀장의 인생은 꽤 괜찮은 이야깃거리였다. 사람들은 전태원 팀장의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특별하게 특이한 것 없는 일상을 전태원 팀장의 인생은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에게 그의 인생은 그저 심심한 시간과 공간을 채우는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팀장과 사이가 벌어졌음을 재경은 본능처럼 알았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말했다. “군대 갔다왔지예? 원래 맞선임한테 찍히면 피곤한거 알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재경은 팀장과의 관계를 말했다. 그는 군대와 사회의 관계가 ‘위상동형’이라고 했다. 위상동형은 수학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붙이거나 떼어내는 일 없이 모형을 변형하는 것이라고 했다. 틀이 달라지지 않는 선에서, 늘이거나 줄이는 방식으로 다른 모형을 만드는 것. ‘위상동형’. 그것을 기억했다.
재경은 ‘위상동형’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자신이 아무리 살펴도 세상 모든 것이 위상동형 같다고 했다. 점을 길게 늘이면 선이 되고, 반지를 두툼하게 만들면 빨대가 되는 것이다. 재경은 ‘위상동형’이 무엇인지 여러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음수가 있으면 양수가 있고, 더운 게 있으면 뜨거운 것이 있다. 기쁜 게 있으면 슬픈 게 있고 위가 있으니 아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없음’의 위상동형이다. 모든 게 없다. 비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괴로운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의 철학은 이후 나에게 영향을 끼쳤다. 재경은 우주의 모든 것을 더하면 0이라는 숫자가 된다고 말했다. “준현 씨, 과학 전공 했다믄서예? 스티븐 호킹 아시지 예? 그 양반이 했던 말이라. 이게” 모든 건, 변하지 않고 그 늘어나고 줄어들고의 차이뿐이다.
그녀와의 만남도 ‘위상동형’은 관통했다. 만남과 이별은 하나의 위상동형이다. 만남을 만들고 나면 이별은 당연히 생긴다. 그것이 위상동형이다. 이것은 재경이 말한 ‘빨대’를 닮았다. 입구와 출구 두 개의 구멍은 하나로 연결된 하나의 구멍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구멍을 길게 늘어놓으면 두 개처럼 보일 뿐이다. 위상동형은 그런 거다. 그때 이후로 나 또한 ‘위상동형’이라는 말을 좋아하게 됐다. 한쪽 구멍이나 다른 쪽 구멍이나 사실은 길게 늘어뜨린 하나의 구멍이라는 사실. 별개로 알고 있던 것이 사실 길게 늘어진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