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기 전에,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존.F.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취임연설 일부다. 이는 마태복음 6장 32-33절을 닮았다. 신에게 무엇을 바라기 전에 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구하라.
병을 낳게 해 달라, 돈을 벌게 해달라 등 이런 기도에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기도는 주술이 아니다. 신은 인간의 심부름꾼이 아니다. 신에게 요구가 많아지자, 기도문이 주술로 바뀌었다. 이에 예수는 기도문이 잘못됐다고 알려준다. 올바른 기도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읊조린 것이 '주기도문'이다. 거기에는 '해달라'가 없다. 즉, 주술이 없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 입니다.
아멘
'주기도문'에는 '감사'와 '용서'만 있다. 예수는 왜 이런 '주기도문'을 읊었을까. 신은 인간 세계에 개입하여 소원을 이뤄주고 기적을 행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가 이미 이룩한 모든 것이 기적이며 그것이면 이미 완전하다. 기적의 의미를 너무 축소해서 신의 권능을 마법사 수준으로 평가 절하해서는 안된다. 신이 말하는 기적은 병을 치료하거나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앉은뱅이가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신이 행한 '기적' 때문이 아니라 '신'을 통해 '기적'을 행한 것이다.
앉은뱅이는 '신'의 이름으로 자신이 할 수 없을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신체적인 앉은뱅이 뿐만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사람들은 쉽게 무너진다. 실제로 자신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주저 앉아 버린다. 만약 누군가가 '너는 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조금 힘이 날 것이다. 만약 나를 응원하는 그 누군가가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자신도 모르는 힘을 찾아낼지 모른다. 그것이 신이 행한 기적이자, 신으로 행한 기적이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거나, 너무 감사한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무신론자는 그 대상이 없다. 자신에게 감사할 수도 없고 타인에게 감사할 수도 없다. 그저 상황에 감사할 뿐이다. 그때 감사의 대상을 '절대자'로 설정하는 것만으로도 마음껏 감사할 수 있다. 자신의 잘못으로 어떤 일이 어그러졌을 때, 용서를 빌거나 회개를 하고 싶을 때, 그때도 마찬가지다. 대상이 불분명하다면 감정을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때도 역시 대상을 '절대자'로 설정할 수 있다. 어쩐지 우주를 창조한 절대자는 '대자대비'하여 모든 용서해 줄 것 같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누군가, 무엇이든 응원해주는 누군가, 언제나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꽤 위안이 된다. 심지어 대상이 일체의 의심이나 편견도 없는 '절대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옳고 그름을 덮어두고 믿는 일. 그것을 '맹신'이라 부른다. 신은 인간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그의 답은 이미 내려져 있고 인간은 그것을 찾을 뿐이다. 신의 권능함을 도구로 삼는 이들은 이 맹신을 이용하여 가장 인간 같은 혹은 인간 이하의 일을 저지른다. 고로 인간에 대한 맹신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